보리밭 사잇길로
보리밭 사잇길로
  • 김종예 <보은회남초 교감>
  • 승인 2012.06.11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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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종예 <보은회남초 교감>

여기저기서 생육하는 초록의 반란과 몸부림에 차라리 눈을 감고 다니고 싶다던 어느 시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새벽이슬로 갓 세수한 청년의 얼굴에 비유한 여름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초하의 들판은 사람의 마음을 청신하고도 튼실하게 가꿔준다.

차창 밖으로 언뜻 선뜻 보이는 보리밭과 호밀밭 풍경도 어린시절 추억들을 불러내기에 흡족하다. 시동을 끄고 오랜만에 보리밭 이랑을 걸어본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뉘가 불러줄 것만 같아서 자꾸만 뒤돌아 봐도, 아무도 뵈지 않는 밭이랑 넘어 찔레꽃 넝쿨만이 하얀 손짓으로 외로움을 더해준다. 해거름 바람이 소슬히 불어오니 청보리 파도물결이 고랑을 넘실대며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데… 함께 걸어줄 사람 정녕 보이지 않는다. 보리는 보리끼리, 꽃잎은 꽃잎끼리 몸을 비벼대며 살랑거리며 함께 놀자고 손짓을 할 뿐, 이 한철 제 홀로 몸부림치며 씨름하는 푸르름이 하늘아래 가득 있을 뿐이다. 이 신록의 물결 안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만도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보리밭, 겨울 벌판에서 눈보라와 온갖 시련을 견디고 몸살을 앓으며 얻은 인내와 순수의 소산물이라서 더욱 청초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노을에 걸린 붉은 단지 하나 너울너울 따라오며 무도회를 여는데, 오랜만에 호젓이 걸어보는 여유로움 때문인지, 내 가슴에도 아직 사람냄새가 나는 건지 눈물이 난다. 보리가 황금색으로 누렇게 익던 보리누름 한철이 되면 배가 고파 보리밭 이랑에 숨어들어 보리서리를 하던 동무들이 보고 싶다. 노릇노릇한 보리를 그슬려서 손에 비벼가지고 너도 나도 배를 채우곤 하였다. 맛있는 보리서리라고 할까? 오늘날처럼 돈만주면 먹을거리가 넘쳐나서 손쉽게 배를 채울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깜둥이처럼 얼굴과 입이 새까맣게 된 서로를 바라보며 배꼽을 쥐고 함께 웃으며 즐거워하곤 하였다, 빈곤속의 만족이라고 할까? 목이 마르면 밭둑에 서있던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입에 가득 물고, 나무마다 인형처럼 매달려서 숨바꼭질을 하다 해가 뉘엿뉘엿해서야 줄행랑을 치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자연에서 스스로 터득한 재미있고 진솔한 학습이었기에 하나도 잊지 못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황토진흙이 마르고 갈라져 숨이 막힐 것 같은 보리누름에 가뭄과 갈증으로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기던 일이 생각나 또 눈물이 난다. 자식들에게 먹을거리를 다 나눠주시느라 당신은 배부르다고 딴청을 피우시던 어머니 목소리가 보리밭 샛길에서 메아리로 들려와 펑펑 눈물이 난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마르지 않는 그리움은 아름다운 영상이 되어 속절없이 바스락대다가 이렇게 연달아 눈물 나게 하나 보다.

나이가 들어도 어디서나 내 곁을 서성대며 그리움을 더해 주는 것은 어릴 적 삶이 안일함과 편안함 대신 고단함과 힘겨움으로 일관되었기 때문이리라.

다 채우지 못한 빈곤의 갈증과 환경의 고난은 연단을 심어주고, 연단은 소망의 닻을 내걸 수 있도록 삶의 탄탄한 발판이 되었으리라.

희망의 빛깔을 축복처럼 뒤집어 쓴 초하의 아침은 세상사에 오염되지 않은 아이들을 연상하게 한다. 청순한 어린 영혼들이 저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지극한 사랑이 어떠한지와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영혼의 음악을 들려주는 조화로운 하모니의 극치를 감지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인생에 유익하랴!

한 잎 새순 같은 우리 아이들이 틀에 박힌 네모상자 앞에서 빠져나와 자연의 순수함과 진솔함 안에서 신나게 뛰어놀기를 바란다.

넘어지고 생채기가 생겨 아파와도 꿋꿋이 이겨내는 강인함과 인내심을 길러서 어떠한 역경과 장애물에도 굽히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을 터득하기를 바란다.

자연의 진리와 섭리를 스스로 깨닫고 아름다운 감성지수 만점인 인성으로 자라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늘과 보리밭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비비배배 노래하던 종달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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