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보험의 이상
의료보험의 이상
  • 충청타임즈
  • 승인 2012.03.22 22: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나는 이상주의자일까? 월 25만원씩 의료보험료를 내면서도 더 내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 실수령액만 따지면 10분의 1에 가까운 보험료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다.

우리나라는 의료보험이 잘 되어있는 나라다. 그런 점에서 자랑스럽다. 우리가 늘 비교하는 미국엔 우리와 같은 전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없다. 돈 넣고 돈 받는 사보험만 득실댄다. 미국에 방문교수로 가는 사람들에게 미국정부가 요구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의료보험이다. 비싼 의료비를 내지 못할 사람은 오지도 말라는 것이다. 실제로 응급처지를 받고 엄청난 그 돈을 내지 않아 미국에는 다시 들어가지 못하는 교수도 있다.

우리의 의료보험의 특징은 외국에 머무는 동안 보험료를 내지 않았더라도 귀국해서 마저 내기만 하면 혜택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디스크로 고생하던 교포가 미국에서 수술하면 몇 천 만원이 깨지게 되어 아픈 몸을 끌고 한국에 돌아와 수술을 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몇 백이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보다 더 좋은 나라도 있다. 갑작스런 사고인 경우 외국인도 공짜로 치료해주는 나라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의 의료보험은 얼마나 좋은 제도일까?

나는 죽을 때 돈 걱정하지 않고 싶지 않다. 누구나 죽는다. 죽을 땐 거의 모두 아프다가 죽는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돈 생각을 해야 한다.

희귀병은 더욱 심각하다. 몇 백 명 이상의 희귀병은 희귀병으로 분류되어 보험이 되지만 몇 명의 희귀병은 너무 희귀해서 보험도 되지 않는다. 피가 새는 병이 있는데, 어디로 새는지 모르다가 한 번에 하혈을 한다. 그러나 너무도 희귀해서 보험이 되지 않는단다.

결국 이상적 의료보험은 '아플 때 돈 걱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돈까지 걱정을 해야 한다면 정말 슬픈 일이다. 아픈 사람 보살피기도 버거운데 집까지 날리라니 너무 서글프다. 게다가 인간으로 태어나서 합당한 의료시술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원시적이라는 소리를 피할 길이 없다.

많은 의료보험재원이 너무도 작은 질병에 적용되고 있다. 감기나 몸살에 적용되는 의료수가는 올려도 좋을 것 같다. 정말 중요한 질병에 쓰여야 할 돈이 경미한 증상에 풀려버리면 정작 중요한 데 쓰지 못하게 된다.

잊지 말자.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 아플 것이다. 아울러 우리 모두 죽을 때는 아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의료보험의 수혜자이다. 죽는 데 돈이 안 든다는 조건만 만족시킨다면 나는 지금 내 월급에서 떼는 의료보험비가 아깝지 않다. 그것이 내가 의료보험료가 인상이 되어도 좋겠다는 이유이다.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허용하면서 내 놓은 조건이 있다. 첫째, 본인이 의사표현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 의사들이 동의해야 한다는 것, 셋째, 어떤 물질적이거나 심리적 압박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직 안락사를 허용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셋째가 완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을 때 돈이 들지 않는 의료보험이 완성되지 않는 한, 안락사 논의는 시기상조인 것이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으로서, 안락사를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믿는 어머니를 둔 사람으로서, 존엄한 죽음 이전에 존엄한 삶의 조건을 요구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