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의 재롱
손자의 재롱
  • 허세강 <수필가>
  • 승인 2012.03.11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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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허세강 <수필가>

지난 설에 손자가 우리 집을 다녀갔다. 3일을 나와 함께 있었는데 이제 세 살된 녀석이 얼마나 부산히 재롱을 떨며 가족들을 즐겁게 했는지 아직도 눈에 선하고 보고 싶다.

설 전날은 시장을 보기위해 마트에 갔다. 2층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1층 식품매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손자와 함께 에스커레이터를 탔다. 느린 것은 조금도 참지 못하는 조급증환자인 나는 에스커레이터를 타자마자 성큼성큼 밸트 위를 걸어 내려갔다. 이때 손자 녀석이 뒤에서 "할지, 할지, 안돼, 안돼, 위험해"라고 소리치며 근엄한 표정으로 나를 불러세웠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거망동으로 세 살짜리 손자에게 꾸중을 듣다니 할아버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들 내외는 맞벌이를 하기 때문에 손자는 첫돌이 되기 전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래서 아마 그곳에서 제대로 기본생활교육을 받은 듯 하다.

요즘 신세대 부부들은 자녀를 그렇게 많이 낳치 않는다. 둘, 하나가 대세다. 낳은 자녀를 이 시대 최고의 선남선녀로 키우기 위해 겨우 "엄마 아빠"라는 우리말을 시작할 때부터 영어학습을 시키는 등 조기교육의 열풍이 노도처럼 일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식키우기 위해 뼈빠지게 일한다는 말은 들었어도 노부모 봉양하기위해 그렇게 일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하는 것인가 손자의 모습을 보며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오늘따라 왠지 손자 녀석의 모습이 더 보고 싶어진다. 컴퓨터를 켜고 손자가 다니는 어린이집 카페를 접속했다. 며느리가 전화를 해 그곳에 들어가면 손자의 활동사진과 동영상이 있으니 한번 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원생들의 성장기를 적어놓은 재미있는 글과 사진이 많이 탑재되어 있었다. 영어수업이란 제목을 클릭하여 열어 보았다. 여섯 명의 또래가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추며 흥얼거렸다. 손자도 그 속에 있었다. 모두 리듬에 따라 어깨를 들썩이고 박수치고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오직 제일 어리고 조그만 손자 녀석만 키 큰 누나와 형들 사이에 끼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들을 힐끔거리며 언리드미컬한 동작을 우스꽝스럽게 연출했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자 다른 아이들은 가만히 있는데 혼자 껑충 뛰어오르는 예상 밖의 율동으로 대미를 장식해 한없는 웃음을 자아냈다. 함께 동영상을 보던 아내가 "저 녀석이 아무래도 당신을 닮은 것 같아요. 할아버지의 천부적 음악성(音惡性)을 이어받게 된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인데"라며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손자의 동영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주변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치가 유머러스하게 좌중을 휘어잡아 리드하는 자기 아빠를 빼다 박았다. 그런데 왜 식구들이 손자의 재롱으로 할아비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만인이 인정하는 음치이고 박치이고 몸치인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손자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아내에게 "이젠 당신보다 손자가 더 이쁜 것 같아"라고 하였더니 아내가 "저도 Me too에요" 라며 씩 웃는다. 손자가 "할지"라고 부르며 내게 달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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