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흥이방죽에서
원흥이방죽에서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2.03.0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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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지난 주말 시간을 내어 산남동에 있는 원흥이방죽에 가 보았다. 느티나무가 서 있는 옛 방죽은 청주법원의 현대식 건물에 둘려싸여 있었다. 시간을 따로 내어 찾지 않으면 발길이 잘 닫지 않았다. 때문에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저 스쳐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곳은 내 어린 시절 아련한 추억이 서린 정겨운 방죽이었다.

내 고향은 오래전 청주의 오지였던 산남동이다. 3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농촌마을이었다. 몇 개의 자연부락과 '탑골'과 '원흥이'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방죽 옆 느티나무가 있는 '죽말'이라고 부르는 작은 마을에 김씨와 오씨네 몇 가구가 살고 있었다.

느티나무를 보니 그때 근처 나무대문집에 살던 분이 생각난다. 성탄절 전날 밤 교회에서 새벽송을 부르며 이 곳까지 걸어왔을때 집주인은 대문에 등불을 밝혀 놓고 어린 성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주를 검은솥에서 떠 주셨다. 그리고 몸 좀 녹이고 가라고 한 고마운 분이었다. 우리들은 따끈한 감주를 마신 후 힘을 얻어 추위도 모르고 즐겁게 새벽송을 돌 수 있었다. 그때의 따뜻한 정은 반세기가 지났어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어릴 때의 방죽은 무척 크게 생각되었다. 바다가 없는 충청도에 사는 나에겐 그 곳이 바다처럼 넓게 보였다. 봄이 되면 방죽 근처에 나물캐러 자주 갔다. 그 때에는 방죽 물이 이미 봄기운에 녹아 봄하늘이 담긴 잔잔한 호수처럼 구룡산의 모습을 담곤 했다. 방죽 양지쪽에서 나물을 캐다 언덕에 오르면 넓은 방죽물이 보였다. 얼음이 녹은 방죽 물을 바라보면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출렁거리는 방죽 물을 바라보며 나의 어린 꿈을 키웠다.

결혼해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친정에 갔을 때, 아버지가 손자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기 위해 그곳에 데리고 갔다는 것을 성장한 막내아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고향은 도시화로 옛 모습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 높은 빌딩 숲으로 변했다. 그러나 산남동은 두꺼비를 보호하자는 관심 많은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원흥이방죽은 잘 보존되어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원흥이방죽 근처에 살던 마을사람들은 모두 떠나갔다. 그러나 방죽은 느티나무와 함께 도심지의 한 곳에 자리 잡아 자연과 호흡하는 생태공원으로 거듭났다. 어린이들의 생태교육장과 더불어 시민들의 산책로와 휴식공간으로 조성되었다.

내가 찾은 작은 원흥이방죽은 산란을 위해 찾아 올 두꺼비들을 기다리는 듯했다. 삭막한 도시화로 자연이 점차 잠식되고 있지만 그나마 방죽이 보존되어 얼마나 다행인가. 도심 속에도 자연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느티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아 본다. 옛 기억이 새롭다. 어릴 때 함께 지내던 정남이도 이곳에 살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 때의 친구들이 보고 싶다. 두꺼비 생태공원의 산책길에 봄비가 내리면 파란잔디가 돋아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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