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길을 걸으며
성안길을 걸으며
  • 이효순
  • 승인 2012.01.15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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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흰 눈이 내린다.

뽀드득, 뽀드득, 하얀 눈을 밟으며 성안길을 걸었던 50년 전, 꼭 이맘때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사촌오빠와 함께 손을 잡고 바쁘게 따라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사촌오빠는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다니고 있었다.

1960년대의 시골은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이 많았다. 봄이면 양식이 떨어져 장리쌀을 빌려다 그 해 농사를 지어 고리로 갚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어서 부모님은 섣달이 되면 양식걱정을 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중학교에 진학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진학을 포기한 채 겨울방학을 집에서 보내는 중이었다.

졸업을 앞둔 오빠는 잠시 고향에 다니러 오셨다. 우리 집에 들러 부모님에게 공부 잘하는 동생을 왜 중학교 안 보내려 하느냐며. 따지듯이 말하였다. 여자들도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부모님께 말씀한 후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청주 시내로 향했다.

여중 원서 마감 하루를 앞두고 너무 촉박한 나머지 빠른 걸음으로 사진관과 도장포를 들러 목도장을 새기고 학교에 가서 담임선생님께 서류를 작성하여 원서를 제출했다. 그때부터 방학 중에 쉬고있던 나는 다시 학교에서 진학을 준비하는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합격을 하여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내 삶의 길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으나 그때마다 슬기롭게 넘길 수 있었다.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그 기회를 잡고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가는 이에겐 값진 대가가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다.

그때 만약 오빠가 나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한 생각이 든다.

출발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세월이 지난 후의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되는 것 같다. 참으로 선택은 중요하게 생각된다.

중학교 다닐 때 스승의 날 편지를 쓰게 되면,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과 오빠에게 감사편지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철부지였지만 마음 한 곳엔 늘 사촌오빠에 대한 고마운 연민의 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안길을 걷게 되면, 오빠와 손을 잡고 바쁘게 따라다녔던 어린 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오빠의 권유에 따라 추운 겨울날 딸을 조카에게 믿고 맡기신 것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 오빠도 칠순이 되고 나도 60 이 넘었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신지 20년이 지났다.

오빠와 함께 걸었던 성안길은, 청주 상권의 중심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아직도 흰 눈 내린 그 때의 성안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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