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32>
잊혀져 가는 생활도구 <32>
  • 충청타임즈
  • 승인 2006.03.3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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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냥
1960∼70년대 나무를 때서 밥을 하고 등잔불 생활을 하던 시절, 불을 붙이는데 가장 요긴하게 사용된 것이 성냥이다.

당시 어느 가정이나 성냥이 가장 중요한 생활도구였다. 6·25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이 사용하던 휘발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지프라이터’가 있었으나 가격이 비싼데다 휘발유나 스파크를 일으키는 ‘라이터돌’을 사야하는 불편으로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성냥은 가정에서 사용하던 ‘덕용성냥’으로 통칭되던 큰 ‘통성냥’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담뱃불 등을 붙이던 작은 ‘곽성냥’으로 구분됐다.

곽성냥은 모양이 다양하게 생산되고 성냥곽에 광고문구와 각종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어 상품이나 회사 선전(PR)용으로 유행처럼 생산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냥이 발명된 뒤에 휘발유를 연료로 사용하고 라이터용 돌을 끼워 불꽃을 튀겨 사용하던 ’휘발유 라이터’가 유행하다가 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값싸고 대중적인 ‘가스라이터’가 폭넓게 생산되면서 성냥의 큰자리가 위축되고 말았다.

인간은 불을 발견하면서 문명생활을 크게 발전시켰다. 불을 일으키는 것중에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이 성냥이다.

1950년대 초 청주시 북문로 현 중앙시장에 ‘유엔성냥’공장이 있어 가정용 ‘덕용성냥’과 ‘곽성냥’이 매일10리어커 가량 생산되고 있었다.

성냥은 미루나무를 잘게 쪼개가는 개비를 만들고 끝에 황을 찍어 성냥골을 만들고 유리가루를 바른 곽(통)을 만들어 그속에 성냥골을 담아 완성시켰다. 그 당시 친구가 근무하는 공장엘 찾아갔었다. 6명의 남자직원은 연료를 배합해 성냥골을 생산하고 14명의 여종업원들은 성냥통을 만들어 그속에 성냥골을 담고 있었는데, 그 손놀림이 무척 빠르고 일정해 볼거리가 됐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성냥은 인천에서 생산되는 ‘조양성냥’과 서울 마포에서 만들어지는 ‘공작표 성냥’ 등이 전국적으로 판매돼 왔다.

필자가 유년시절 고향에서 사용되던 성냥은 노란황을 끓여 대패밥을 굵게 켜서 그것을 쪼갠 끝에 황을 묻혀 화롯불에서 불을 붙여 등잔에 불을 켜고 담뱃불로 쓰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성냥은 언제 발명되었을까.

성냥은 1827년 영국인 ‘워커’가 발명했는데 워커는 외과의사를 지망, 공부를 하면서 화학적인 실험을 통해 나무개비 끝에 황을 발라 유리가루를 바른 천에 마찰을 시켜 불이 붙는 것을 발명한 뒤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성냥을 만들었다.

그는 염소산칼륨과 황화안티몬을 아라비아 고무와 반죽을 해서 별목적 없이 천에 발라 보았다.

그는 그것을 난로옆에 두었다가 뜨거워진 열에 불이 붙는 것을 보고 그것을 적립하여 성냥을 탄생시켰다.

처음 75㎜의 나무개비에 둥근 머리를 한 성냥골을 만들고 유리가루를 바른 천에 마찰을 시켜 불이 켜지는 성냥은 120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딱성냥’이라고 있는데 이것은 성냥골을 단단한 나무나 시멘트벽에 마찰시키면 불이 붙는 성냥으로 편리하지만 휴대에 위험이 있어 특수목적에만 쓰였으며, 미국 서부영화에서 총잡이가 가끔씩 답배에 불을 붙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볼수 있다.

이런 성냥은 물기가 묻거나 바람이 불면 불을 켤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라이터가 발명되었고, 라이터는 연료를 휘발유에서 가스로 발전시켜 지금은 300원 안팎이면 ‘1회용라이터’를 구입해 쓸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돼 성냥을 찾는 이는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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