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그대가
만약 그대가
  • 강희진 <수필가>
  • 승인 2011.12.13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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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강희진 <수필가>

내가 출근하는 길은 새로 난 우회도로로 늘 한가한 도로이다. 이 길에서 나는 주차를 못해 끙 끙 대는 어설픈 운전자도 아니고 고속도로에서 짐 실은 차 뒤를 추월도 못하고 따라가는 소심한 운전자도 아니다. 여기에서만은 무법자요, 간 큰 운전자다.

이 길은 2킬로미터 이내에 신호등이 네 개나 있다. 처음 그 길을 달릴 때는 신호를 꼬박꼬박 지켰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 나만 신호등에서 서 있고 나머지 차들은 쌩쌩 달리는 것이었다. 왠지 나도 손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룸 미러로 살핀 뒤에 차가 오지 않거나 마주 오는 차가 없을 때만 슬그머니 신호등을 무시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사잇길에서 차가 오지 않으면 힐끗 쳐다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한 번 그렇게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기 시작하니 어느새 나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얼마 전 작은 아이와 함께 그 길을 가는 중이었다. 나도 모르게 빨간불에서 멈추지 않고 달리자 아이가 "엄마, 지금 빨간불이야!" 하고 외쳤다. 그 순간의 민망함이란! 아이에게 "아, 그랬어 엄마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고 미처 빨간불인걸 보지 못했구나" 하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그 후론 신호등 앞에 서면 갈등에 빠지곤 한다.

출·퇴근을 하면서 다른 차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신호등 앞에서 안쪽 차선의 차가 멈추면 바깥쪽 차선의 차도 멈춰서고, 덩달아 마주 오는 차 또한 멈춰 섰다. 반면에 한쪽 차선의 차가 멈춰 섰는데 옆 차선의 차가 휭하니 달려가 버리면 멈춰 섰던 그 차도 머뭇거리다가 빨간불인데도 출발하곤 했다.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실험하듯 빨간불 앞에서 멈춰서기도 하고 빨간불을 무시하고 지나쳐보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어느 한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서면 같이 멈춰서고, 무시하고 지나가면 머뭇머뭇 거리다가 어김없이 출발하곤 했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그리고 너무나 한적한 길에 몇 미터 간격으로 신호등을 달아놓는 정부를 비웃으며 내달리고는 했지만 신호를 지키지 않았을 때 '내 마음 속에는 이래도 되는가' 라는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나만 그러는 것 아니라는 이유로, 아침 출근 시간이 바쁘다는 핑계로, 저녁엔 저녁 모임 늦는다는 이유로 신호등을 무시하며 내 합리화를 시켰다.

사람마다 사회적 규범이 엄격하게 작용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사회적 규범이 느슨하게 작용하고 사람들이 있으면 갈등하고 눈치를 본다. 눈치를 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사회적 규범을 일깨우는 일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규범이 있지만 그 규범을 꼭 지켜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드물고 오히려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내 출근길 횡단보도에서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지금까지는 무사했지만 사고가 날 확률은 항상 존재하고, 내가 신호를 지키지 않으면 대형 사고가 날 확률은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이런 신호등 하나도 늘 사고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데 복잡하고 다양한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규범이 무시된다면 얼마나 큰 문제들이 일어나겠는가?

아침 출근길 신호등 앞에 멈춰서니 옆 운전자도 멈춰섰다. 그래서 옆 차의 운전자를 보며 그대도 앞으로 내 지킴이가 되어 달라는 의미에서 유리창을 내리고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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