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의미
당신의 의미
  • 정상옥(수필가)
  • 승인 2011.11.21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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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따각따각 발소리가 들린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목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들린다.

며칠 전 사소한 부주의로 남편은 정강이뼈가 골절되는 사고를 겪었다. 순간의 실수는 수술대에 올라 철심으로 고정하는 처치를 한 후로도 긴 시간을 목발에 의지하고 생활해야 한다는 결과를 통보 받았다.

행동반경이 넓어 시간을 쪼개며 써야만 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발이 묶이고 한정된 공간에서도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으니 자괴감에 한숨만 내쉬고 있다. 여태껏 집안 살림은 안주인인 내손으로 모든 것이 꾸려져 나간다고 장담하며 살았었는데 사소하게 여겨졌던 잡다한 것들도 남편의 손을 거쳐야 쓸 수 있는 것들이 왜 이리도 많은 건지.

오른발을 다쳐 운전을 못해 출타할 때마다 동행해야 하니 한동안은 다정한 중년의 부부애를 한껏 누리고 살아야 할 판이다. 이것이 결혼 삼십 년을 목전에 둔 호사라 해야 하나.

서툰 목발에 의지하여 발자국을 떼는 남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걸으니 이렇게 한쪽 방향을 향해 온 세월이 유수처럼 느껴진다. 그 많은 날들 중에는 꽃피는 봄날도 있었지만 모진 눈보라와 싸우고 풍랑을 피하려고 허덕이며 비틀대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마다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고 객기를 부리며 앞서려 할 때는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게끔 잡아주는 서로의 목발이 되어 주던 그와 나였다.

미래를 알지 못하고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말처럼 삶의 고비를 넘길 때마다 미지의 내일은 반드시 어제의 땀과 노력으로 이뤄낸 성공이 평온으로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꿈을 꾸며 희망의 등불을 밝히던 우여곡절의 그 많은 날들……. 각기 다른 뿌리에서 움을 틔워 세월의 흐름 안에서 한 몸으로 자라는 연리지(連理枝)처럼 아무런 혈연도 없으면서 새로운 혈연의 창조자가 되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웬만한 허물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 불같이 서로에게 성낼 일도 없고 또한 신선한 매력으로 촉각을 자극할 만큼 짜릿한 느낌도 없는 무미건조한 나날을 살아오고 있지 않았던가. 가장 미덥고 가장 사랑하며 나의 온 미래를 맡기고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났지만 함께한 세월의 나이테가 굵어질수록 차츰 예사로운 사람으로 여겨지고 때로는 시들하게 생각해지기도 했었다. 이때 즈음하여 천생연분이라 한 나의 당신, 남편의 사고는 서로의 존재가치를 일깨우려 했나 보다. 부부는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라더니 흐릿해져 가는 우리에게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하늘은 다시 일깨워 주려 했음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부란 두 개의 반신이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어 사는 것이라 했던가. 세월의 흐름 따라 무디어져 살아간다지만 그의 어깨에 내린 삶의 무게가 곳곳에서 더 크게 보이고 희끗해진 머리칼에서 안쓰러움과 측은지심이 때때로 울컥울컥 일곤 한다.

굳이 고맙다 말 안 하고 함께해서 즐겁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하는 두루뭉술한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더 빛나고 곧고 굵은 값어치로 우리 가정 안에서 축을 이루는 존재의 의미를 더해 가리라.

어느덧 계절은 초록이 떠난 자리에 형형색색 물이 들어 단풍지고 짙은 가을 색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 부부가 살아온 모습처럼.

남편의 어느 것 하나도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으로 알고, 내 것으로 만들어 또 내 것이 되어 보듬고 살아온 세월들을 이제 사랑이라 말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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