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가을날의 낙서
늦은 가을날의 낙서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1.11.0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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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가을비에 잎이 진다. 소리 없이 가만가만 내려앉는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나무들이 투둑 투둑 잎을 떨군다. 습한 바람결에 알알한 낙엽 냄새가 묻어온다. 화려한 축제가 천천히 막을 내리는 중이다. 이 비 그치고 몸살처럼 달아올랐던 시간이 지나면 찬바람 마른 잎 서걱이는 쓸쓸함이 배어들겠다.

늦은 가을이면 얼어붙은 거리를 외롭게 걸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의 긴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삭막한 착각과 아부 속에서 참된 삶을 살지 못했다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 그토록 피하던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던 늙은 족장의 고독한 마지막이 영화의 엔딩장면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을 뿐.

마르케스의 <족장의 가을>은 19세기 이후 존재했던 중남미 여러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독재자의 원형을 그린 작품이다. 마침표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독재자에 대해 분노를 느끼기보다 권력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고 언제 닥쳐올지 모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어둠 속에 갇혀 사는 초라한 그의 진실에 동정을 품게 된다.

‘거짓과 범죄에서 자양분을 얻고 고독한 권력의 악을 키워 굴욕적인 운명에 보상받으려 했던 그는 끝내 자기가 자신의 모든 권력의 주인이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지만 삶의 가치를 알기 전에 죽음을 맞이한다. 낙엽이 얼어붙은 거리를 외롭게 걸으며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에 환호하는 군중들의 함성을 들어야 했다.

사실, 소설 속 문장에도 있듯 ‘권력이 없어도 통치를 하고 영광이 없어도 찬양을 받을 수 있는’ 독재자를 만드는 것은 발 아래 엎드린 모두의 힘일지도 모른다. 허위로 복종하며 힘의 세력에 편승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에 침묵으로 동조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관계에 무관심한 수많은 민중들에 의해 권력은 만들어지고 움직이게 되니 말이다. 한때 제3세계의 영웅이었던 리비아의 카다피가 시민군들에게 짐승처럼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면 권력은 독재자 한 사람만의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듯 영속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은 없다.

11월이면 유난히 처리하지 못한 난제들을 두고 정치권이 요동친다. 해결해야 할 민생과 한·미 FTA를 두고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꼴이 영 볼썽사납다. 권력의 힘이 어디로 흐르는지 새떼처럼 포릉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다. 무조건 밀어붙이기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국익을 위한 결정이 내려지길 바란다. 족장 또한 거짓으로 민중의 눈을 가리는 부끄러운 정치는 하지 않기를. 하여 떠나는 족장을 고마움과 아쉬움으로 이별할 수 있게 되기를.

비에 젖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나는 나뭇잎들로 길은 아름답다. 그 길 위에 선 내 뒷모습을 상상해 본다. 나 또한 내 삶에 진정한 족장으로 살았는지. 관계에 끌려 다니는 허울 좋은 껍데기는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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