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너를 보며
내가 아닌 너를 보며
  • 정효준 <새터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1.10.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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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주변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을 부축이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책상에 제대보를 깔고, 신자들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미사를 봉헌하다가 이제는 제단이 생기고, 장궤틀이 생기고, 십자가가 걸리고, 성모님을 모시니 성당의 꼴을 갖추어 놓은 것 같습니다.

이제 보름 정도 지나면 추위를 막아줄 임시 건물이 완성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 조립식 건물에 살라고 했다면 불편한 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사방이 막힌 그 조립식 성당이 간절히 기다려집니다. 그 희망이 지금의 불편함을 이겨낼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우리 공동체가 제가 봐도 대견한데 주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대견하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쌓아지는 우리의 보화들이 하느님 나라의 큰 자산이 됨을 되새겨 봅니다.

얼마 전에는 지난 본당인 광혜원 성당을 다녀올 일이 생겨 길을 나섰습니다. 광혜원 성당에 주임 신부로 있을 때는 청주 교구청이 가깝게 느껴져서 하루에 두 번도 왔다가곤 했는데 사무일로 그곳을 가는데 굉장히 멀게 느껴졌습니다. 정신없이 달려온 한 달의 시간만큼 이 거리도 멀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달려 광혜원 가까이 가서 전화를 드렸는데 신부님께서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셔서 만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무일을 봐 주면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는데 할 수 없이 혼자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식당 개업을 하는 광혜원 신자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식당을 찾았습니다. 조용히 밥만 먹으려 했지만 개업 축하를 해 주기 위해 식사하러 오신 다른 신자분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조금 달랐습니다. 인사를 나누는 신자분들이 낯설어서가 분명 아니었습니다. ‘왜 이렇게 느낌이 다르지?’라고 던진 스스로의 질문에 답은 그들의 표정이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이 바뀐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광혜원에 있을 때 그들의 표정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표정 뒤에 숨겨진 뜻을 찾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습니다. 본당 신부로서 그들의 생각을 읽어야 한다는 나름의 생각 때문에 그들 표정보다는 말에 관심이 쏠렸고, 순수하게 표현된 것들에 소홀했습니다.

사실상 그들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은 지금에서야 속이 아닌 겉이 보이고, 마음보다는 표정이 보였습니다. 과연 무엇이 더 중요한가. 겉으로 드러난 순수함을 보는 것인가, 숨겨진 것을 알아차리는 지혜인가. 물론 그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닌 너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비난을 위한 관심이 아닌 사랑하기 위한 노력으로서의 관심이 공동체를 이끄는 가장 큰 살아 있는 힘임을 안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코스모스가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여기에 코스모스가 있었나?’ 3년 동안 가을마다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던 코스모스가 이제야 정겹게 보였습니다. 누구나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 그리움은 지금은 없어진 것들에 대한 것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 그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것 때문입니다. 결국 내 자리에서의 변화된 시각은 앞으로 다가올 안타까움을 줄여줄 것입니다.

다음날 하늘이 흐려지더니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외부 패널 작업이 마무리되는 날이었는데 하루를 더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속이 상했습니다. 기도상에 앉아 불평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 그동안 허락해 준 맑은 날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퇴색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루만 더’라는 나의 욕심이 지난 시간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앗아간 것입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아닌 너를 향한 사랑의 시선을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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