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리에 무엇을 다시 채울까
떠난 자리에 무엇을 다시 채울까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1.09.2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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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요즘 들어 자꾸 눈이 침침해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가을햇살이 투명하게 유리창을 넘어와도 뿌옇게 안개 낀 것처럼 선명치가 않다.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만 손등으로 비벼대다 찾은 안과에서 노안이라는 결과를 통보받으니 맘마저 우울해진다. 흐릿한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다가 상실의 설움이 울컥 들어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청명한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

잃는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다 하더니 참으로 이상하다. 눈이 침침해지면서 책을 읽는 것도 시들해지고 휴대폰으로 주고받던 문자 메시지조차 흥미를 잃었는데 엉뚱하게도 다른 쪽으로 더 밝아졌다. 안경을 쓰지 않고도 다른 사람의 찡그린 얼굴표정이라든가, 실수들이 그냥 허투루 지나쳐 보이질 않고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눈을 돌리려 해도 마음의 눈은 작은 실수나 성난 표정에 초점이 고정되고 퍼런 서슬로 날을 세워 맞서려 하는 좁은 소견이 내 속내를 잡아 흔든다.

세상을 살면서 누군들 매사에 좋은 점만 겸비하고 살 수 있으랴. 살다 보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수많은 허점들을 나 또한 어둠 속에 비치는 선영처럼 몇 자락 깔고 살아가곤 한다. 그 허물들이 남들 눈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때론 적당한 이유를 붙여 합리화로 포장한 타성에 젖어 살다 보니 정작 내 허물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아둔함이 있다. 드러내어 잘라내고 씻어내야 하건만 내 속에 잠재한 고정관념과 아집은 냉철한 판단 앞에서 시야를 흐리게 하여 습관처럼 덮어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사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에 감춰지고 숨겨진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진정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을 만나면 손으로 주고 받은 선물이 없어도 그날은 마음이 마냥 좋아진다. 그 사람은 어떤 곳에서든, 어떤 것이든 좋은 점 한 가지를 꼭 찾아내어 인정하며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곤 하니까. 마음의 눈으로 선별하는 양심의 잣대만큼 정확한 판단이 없으니…….

내 젊은 날의 밝은 눈은 어떤 것을 보고 찾으려 했었나. 겉으로 비추어지는 모습만으로 상대를 평가하고 몇 척(尺) 안 되는 그 짧은 시야와 좁은 소견만이 절대인 양 잣대질하던 편견과 편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눈에 그려진다. 지나간 내 청춘의 밝은 눈은 자신의 결점을 인지하지 않고 상대의 들보만을 찾아냈던 덜 여문 인격의 시력이었으리.

아무리 인성이 모난 사람일지라도 장점 하나 없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작은 단점 하나가 오랫동안 맺어온 좋은 관계를 영원히 돌아서게도 하지만 작은 장점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인연의 끈이 되어 평생 벗으로 함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화된 시력으로 당장 눈앞에 있는 잡다한 것들이 좀 흐리게 보이면 어떠랴. 흐르는 세월 속에서 떠나간 자리에는 상실의 허무만이 있는 것은 아니리라. 내가 이제는 안 봐도 될 것들은 보지 말라며 신이 내린 눈의 휴식 선물인지도 모른다.

작은 불빛 하나가 어떤 큰 어두움도 이기고 몰아낸다 했듯이 마음을 상하게 하는 어둡고 칙칙한 면에는 눈을 질끈 감으리라. 풋내기 시력이 떠난 그 자리에 긍정과 배려, 감사와 사랑하는 마음의 눈을 키우며 후덕하고 따뜻한 눈길로 지금껏 보지 못했던 훈훈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이 커진다면 나이든 대가로 그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으랴.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 사이로 가을햇살을 내리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청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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