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을 보이며
뒷모습을 보이며
  • 정효준 <새터성당 주임신부>
  • 승인 2011.08.2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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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목소리
"축하를 해야 하나요? 아니면 위로를 해 드려야 하나요?"

지난 인사 이동 공문 발표 후 인사 전화나 메시지의 공통된 내용이었습니다. 이동되는 장소가 시내 지역이기는 하지만 신설 본당이라 겪게 될 어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얼떨떨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봤습니다. 두려움 반 설렘 반.

사실 두려움으로 시작했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많이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자전거 손잡이를 처음 잡았을 때, 운전대를 처음 잡았을 때, 곳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오가는 로마에 첫발을 디뎠을 때, 첫 본당 신부로 신자들 앞에 섰을 때 등.

그러니 새로운 공동체의 첫 사제로도 잘 살아갈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렇게 인사 공문을 보고 첫날 밤은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며 늦게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모든 것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갑작스러운 인사에 정리의 손길이 바빠진 것은 물론이고, 서류 정리와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먼저 사제관 1층을 보수하고 곳곳의 묵은 때를 벗겨냈습니다.

손은 청소를 하며 짐을 싸고 있지만 머릿속은 올해 하반기에 계획했던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9월에는 추석을 맞아 떡 선물을 하려 했고, 10월에는 반별로 미사와 견진 교리도 하려 했고, 11월에는 견진 성사가 있고, 12월에는 세례식이 있는데. 후임 신부님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은 일들 때문에 조금 죄송스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문서상으로 각종 모임과 계획을 남기며 인간의 계획은 하느님의 계획 앞에 부질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열심히 살고, 내일 떠날 것처럼 준비하라.'

얼마 전 보은에 있는 동창신부 집에 볼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집에 돌아오기 위해 차 문을 여는데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별 신경 안 쓰고 집으로 향했는데 운전하는 동안 차 안을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운전에 큰 방해를 주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애써 창문 밖으로 쫓지는 않았습니다. 파리는 광혜원에 도착해 차 문을 여니 함께 내렸습니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이 파리는 자신이 열심히 날아 보은에서 광혜원으로 날아왔다는 착각에 빠져 있지 않을까? 자신이 열심히 돌아다닌 공간은 그저 차 안이었는데 보은에서 광혜원까지 자기를 태워다 준 차를 알까?

그러면서 내 삶을 봅니다.

열심히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내 힘으로 내 원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큰 배를 타고 선장이신 주님께서 이끄는 곳으로 가고 있음을 나는 깨달으며 살고 있는가.

자아도취에 빠져 여전히 내가 주인임을 자처하고 있지는 않은가?

광혜원 성당을 떠나며 그동안의 많은 일들에 있어서 선장이신 주님의 뜻을 내 계획으로 덮어쓰기를 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새 부임지를 생각하며 들었던 두려움은 바로 다시금 선장의 자리에 서고픈 욕심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분명 선장이신 주님께서는 새터 성당이라는 배를 올바른 길로 잘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선장의 지시를 받아 그분의 뜻을 실현하는 충실한 종으로서 살아낼 것입니다. 3년 전 첫 본당 신부로 광혜원을 들어설 때 느꼈던 그 느낌을 되새기며 오늘 새터 본당을 들어설 것입니다. 비록 반조립식 건물에 천막을 붙여서 부임식을 할 것이고, 그 자리에서 당분간 미사를 봉헌하겠지만 그 또한 하느님의 큰 계획 안에 있을 것이기에 뿌듯할 것입니다.

쓴 한약을 자녀에게 주는 마음으로 그분은 어느 정도의 시련과 아픔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의 한약의 효력을 알기에 기꺼이 받아 마실 것을 다짐해 봅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나니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많이 축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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