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할아버지가 그립다, 가끔
그 할아버지가 그립다, 가끔
  •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목사>
  • 승인 2011.08.22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 자의 목소리

1995년 1월. 우리 교회가 탄생했다.

썰렁한 대지 한복판에 논바닥을 메워 조립식으로 세워진 건물은 십자가만 떼면 영락없는 곡물창고였다. 오십평 건물의 바닥 면적에 칸을 막고 이쪽 서른 댓평을 교회 본당으로, 저쪽 열 댓평을 담임목사 사택으로 사용하면서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 교회당 맞은쪽에 홀로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 ‘한용제’라는 이름 하나, 그리고 버려진 박스를 모아 돈을 만드는 일이 이력의 전부인 그. 그분이 교회당에 오면 역한 술 냄새가 예배를 하는 성도들의 코를 찔렀다. 내가 설교를 하고 있는 동안 어느샌가부터 그분의 코를 고는 소리와 나의 설교 음성이 뒤섞여 있었다. 그분에게 나 혼자만 부르는 ‘나사로’라는 별명을 붙여 놓고 있었다. 나사로의 집을 한 달에 한 번꼴로 방문하는 날이면 나와 아내는 설레었다. 아내가 만들어간 음식을 맛있게 들며 우리 아이들의 재롱을 보면서, “아하, 고것들 참 잘한다”며 만면에 웃음을 만들던 그 모습이 우리 부부를 설레게 했었다. 내가 “할아버지, 뭐가 소원이세요? 뭐라고 기도해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오래 살고 싶지!”라고 답하던 분이다.

내 기도가 약했던지, 몇 개월 후에는 중병을 얻어 마지막 숨을 몰아쉬게 되었다. 나사로가 하늘로 가시던 날 그분은 내게 일생일대의 큰 선물을 안겨 주셨다. 중환자실에서 간호사가 다급하게 불렀다. “한용제 환자 보호자님 들어오세요. 곧 돌아가십니다.” 나와 아내가 들어갔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나사로의 손을 잡고 기도를 드렸다. 이 힘들었던 인생의 영혼을 마지막 하늘로 향하는 길에 주님의 천사의 영접을 받게 하여 달라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간절하고도 짧은 기도가 끝나자 간호사의 조금은 사무적인 말이 들려왔다. “돌아가셨어요.” 그분은 내가 기도하는 순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이 보내신 천사의 영접을 받으며 육체의 내 손에서 영혼의 손을 천사에게 맡기고 가지 않았을까? 오호, 이 큰 영광이여! 영혼을 위하여 일하는 주님의 종으로써 한 영혼이 숨지는 그 순간에 기도를 드리며 올려 보내드리는 일은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희귀한 일 아닌가? 그 귀한 기쁨을 나사로는 나에게 주고 가셨다. 뿐이랴, 그분의 육체를 마무리하는 영광도 보너스로 주시었으니…. 나사로에겐 연고가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나타나지 않았다. 어쨌든 우리는 그 나사로의 누구도 환영치 않는 시신을 사택으로 쓰던 방에 모셔 와서 빈소를 차렸다. 교회 문 앞에 상가 등을 걸어 놓고 동네의 어르신들에게 부고를 전했다. 평소 측은히 여기고 이웃이 되어 주었던 분들이 한 분 한 분 찾아와 고인을 향해 큰 절을 올리며 마지막 인사를 드렸다.

마침 그날은 교회 창립 3주년 기념일로서 부흥회가 예정된 날이었다. 월요일 오전에 대전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된 나사로와 이별을 하고 그날 저녁부터 부흥회를 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는 특별 부흥 강사를 초빙해 유별난 감동과 결단을 한 것보다 더 큰 의미의 부흥회를 이미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장례식 또한 나사로가 나와 우리교회에게 주고 간 큰 선물이 아니랴? 그 후로 십 수년이 흘렀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그 나사로만큼의 의미 있는 만남은 없는 것 같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특히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아픔이 느껴질 때마다 나사로, 한용제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 나사로를 향한 그리움, 그런 아릿함을 갖고 살 수 있는 작은 행복도 그분을 만나게 해 준 하늘의 선물이 아닐까? 한 달여 전쯤 나는 성도들의 투표에 의해 위임목사의 요청을 받았다. 앞으로 맡겨진 십 수년의 목회는 모든 성도를 그 나사로를 만나듯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작은 기도의 제목이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 25:40,45)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