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뻐꾸기
  • 이영창 <수필가>
  • 승인 2011.08.0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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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창 <수필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6월22일부터 장마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연속 비가 내리고 있다. 오늘도 기상청의 일기 예보는 내일까지 250mm이상 장맛비가 내린다고 했다. 밖을 보니 게으른 사람 핑계 좋을 만치 비가 내리고 있다. 일기예보가 아무리 오후부터 많은 비를 예보했어도 무거운 먹구름이 없으니 억수 비는 내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집에 죽치고 있어도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 산을 가는 것이 몸을 도와주는 것이고 나 홀로의 고독을 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비는 오는데 옆엔 삶의 동행자가 없다고까지 느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어서 더욱 말 친구가 그리워지기만 한다.  

산을 가자. 산과 대화를 하자. 그러다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그와 대화를 하자. 그것만이 지금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이다.

내가 다니는 안골뒷산은 악 코스가 아니고 10m이상 큰 나무가 터널로 우거져 낮 동안도 어두운 정도의 계곡이다. 평소 남녀노소 많은 시민들이 오르는 산인데 비가 내려서인지 한참을 깊이 왔어도 인적이라곤 전무후무다. 고요 속에 가끔씩 나뭇잎으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려오니 온몸이 으스스한데, 어디서 청아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런 날 뻐꾸기는 왜 사연 깊은 울음소리로 울어 댈까.  

그 소리는 동쪽 어느 가지에서 들려오는가 하다가, 금방 서쪽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산을 계속 오르는 동안 그 소리는 내 마음을 휘감는다. 비와 땀에 몸은 범벅이 된 채 산 정상에 올라섰다. 그곳 선반다리 정상에는 여인네 둘이서 열나게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얼마 후 내가 쉬고 있는 작은 정자로 들어왔다. 서로 간 낯선 얼굴이지만,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얼마 간 비를 피해 있는 동안 세 사람이 있는 정자엔 서먹한 시간이 흘렀다.  

나는 숨 막히는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지만 뻐꾸기를 잘 아시지요.” , “아~뻐꾸기 모르는 사람 있나요.” , “조금 전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으셨어요?” 그러자 그중 한 사람이 또다시 대답했다. “네 들었어요.”, “그렇다면 뻐꾸기를 본 일은 있나요?” , “아니요. 아~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잘 아는 것 같으면서 보지를 못했네요.” 

그렇다, 대개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아주 적은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살고 있다. 어쩌다는 본 사람은 있겠지만 대개는 본 일이 없거나 보고도 모르고 지나온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이 보지를 못했다고 한다. 낮은 곳에서 활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경계심이 있어야 살아 남는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그는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가며 구성지게 맑은 목소리로 길게도 울어댄다. 그래서 한곳에서 울고 있어도, 가까이서 또는 먼 곳에서 우는 것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는 둥지를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남의 집에 알을 낳아 대리모가 새끼를 기르게 한다. 그래서 새끼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기르는 어미라 할지라도 철저히 배신한다. 그가 다 성장하면 자기가 자란 둥지를 떠나며 뻐꾹 뻐꾹 “기른 정이여 안녕!” 하고 날아간다. 인간 배신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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