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의 실종으로 거리를 누비기
상·하의 실종으로 거리를 누비기
  •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 목사>
  • 승인 2011.08.01 19: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낮은 자의 목소리
이근형 <포도원교회 담임 목사>

최근 하의 실종이라는 유행이 있다. 주로 일이십대 여성들 사이에서 하체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기 위하여 짧은 반바지를 입은 후 위에 입는 남방셔츠를 그 위에 길게 드리우면 짧은 반바지는 아예 없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히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매끈한 각선미와 동시에 하의를 입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해서 그렇게 이름 지어진 유행이다. 자신의 신체를 적당히 감추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던 시대와는 달리, 적당히 신체의 일부를 보여 주는 것도 아름다움의 표현 방법으로 여기는 젊은 여성들의 스스로 감행하는 노출을 그저 애교로 보아야 하겠지. 그러나 전혀 타의에 의해 옷을 벗어야 하는 경우라면 어떨까? 그것도 상하의 모두라면? 성경의 무대가 되어 있는 유대에서의 일이다. 이사야라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명하신다.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이천 수백년 전의 사회에서 이런 패션은 노예의 것이었다.

허리에서 끈으로 사용하는 베를 풀면 온몸은 누드가 된다. 게다가 신까지 벗었으니 가히 그 흉한 남성의 몰골이 연상이 되고도 남을 일이다. 그 당시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여러 가지 영적으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곧은 소리를 외치고 있는 선지자가 취할 행색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그러나 그렇게 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삼년. 이유는 분명 있었다. 모름지기 선지자란 하늘의 뜻을 먼저 깨달아 전하는 전령사이다. 그 당시의 사회가 그렇게 빗나가다가는 그의 벗은 몸과 같은 수치가 올 것이라는 하늘의 뜻을 그는 미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을 그 모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행한 예표요 상징으로 하는 행위언어였다. 이사야의 그러한 경고는 그대로 되어 유대 민족은 얼마 못 가서 그런 꼴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세계 최강국인 바벨론 제국의 노예가 되어 그렇게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의 그토록 큰 수치를 감내하면서까지 외친 음성을 그 시대의 사람들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가, 소위 선지자라 이름하는 그가 민중의 어리석음을 과연 예측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벗고 다녔을까? 알았을 것이다. 알았겠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라도 해야만 했던 그의 심정은 무엇이었을까?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아니, 애정이었을 것이다. 제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보고라도 생각들 좀 하고 살아주기를 바랐던 그런.

며칠 전 어느 날, 마음이 몹시 괴로워진 한 사람을 위해서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그분의 집 앞에서 두세 시간을 기다려 본 적이 있다. 비가 몹시도 오던 날이었다. 인간 관계문제로 힘들어하는 그분을 반드시 만나서 뭔가 대화를 하고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드려야 되겠다는 충정에서였다. 끝내 그분이 나오시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그래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애정 하나로 벗은 채로 거리를 삼년이나 헤매었던 그 선지자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어디 옷을 벗는 일뿐이랴? 구도자의 길은 어차피 치욕을 받고, 버림받으며, 굶고 맞으며, 고독해지다가 끝내 한 톨의 밀알처럼 죽어져 썪는 것이 주어진 길이거늘. 실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도 우리 이전의 그 누군가가 열심히 그렇게 수치를 당하고 죽어 준 결과물이 아닌가?

자신의 아름다움만을 나타내기만을 위해서 하는 하의 실종 패션과 민족의 각성을 위한 수치의 옷 벗음 사이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