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집 여인
살구나무집 여인
  • 이진순 <수필가>
  • 승인 2011.07.1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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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진순 <수필가>

앞마당에 노랑 불을 밝히기 시작한 살구나무를 올려다본다. 이른 봄 향내를 풍기며 꽃 잔치를 열더니 조롱조롱 파란 열매가 하루가 다르게 굵어졌다. 앞마당을 쓸면서 올려다보는 재미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노랗게 익어가는 열매는 오가는 길손에게 입맛 다시고 가라고 떨어진 살구를 담아 바구니를 나무에 매달아 두었다.

먹을거리가 신통치 않았던 1950년대 살구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사방치기와 세모를 그리고 유리 조각이나 깨진 사금파리를 주어다 땅따먹기 놀이를 했다. 제기차기, 사방치기, 흙 마당에 둘러앉아 공기놀이와 고무줄 놀이를 즐겼던 추억은 친구 얼굴을 떠올리며 이름을 불러본다. 의숙이 임숙이 효섭이 희자 정열이 언년이,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오늘처럼 바람을 동반한 비가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날이면 새벽 일찍이 떨어진 살구를 줍기 위하여 골목으로 모여들었다. 가장 부지런한 아이가 다 주워 가고 나면 허탈감에 빠져 내일은 내가 먼저라는 목표를 세우게 했던 일들을 다른 친구들도 기억하고 있을까?

먹을거리가 풍부한 지금은 떨어진 살구나 빨갛게 익은 앵두·딸기에 관심이 없다. 난 떨어진 살구가 아까워 깨끗이 씻어서 칼로 도려 씨를 빼고 설탕에 재운다. 매실처럼 효소를 담아서 여름철 음료로 얼음을 띄우고 솔잎이나 잣을 띄워 집에 오시는 손님께 대접을 하면 만족해 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겁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희망을 꿈꾸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난 농사전문가가 아니어서 흉내를 낸다는 표현을 한다. 매일같이 내 손끝의 정성으로 자라나는 식물들을 보면 신비스럽다. 참깨 콩 고추 호박과 수세미 도라지 옥수수와 비트를 심어 놓고 메말라 배배 타들어가는 중에 단비가 내리면 하느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밤에는 풍세가 요란한 소낙비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침 뉴스를 보면서 이곳저곳의 산사태 피해 상황을 들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밭에 나오니 술 취한 사람처럼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쓰러져 버린 식물들을 바라본다. 농사는 천심으로 짓는다고 했다. 더위를 참고 햇볕에 몸을 태우며 풀과 끝없는 전쟁을 하면서 가꾼 식물들이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는 인내하기 힘든 일이다. 그 속에는 자녀들이 훌륭해지기를 비는 정성과 남들처럼 잘살아 보겠다는 야망과 이웃들의 건강을 걱정하며 농약을 치지 않고 몸에 이로운 채소나 곡식을 짓기 위한 피나는 희생이 딸려 있었기 때문에 빗물에 녹아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화가 나고 안타까움이 절절해 온다.

물에 잠긴 논밭전지와 산사태 흙탕물이 범벅이 되어 흐르는 물은 성난 사자처럼 넘실거리며 흐른다. 죄 없는 어린 생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원망스러운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원망과 아쉬움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면 무심중에 기도를 한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멈추었다. 호박넝쿨에 노랑 불을 밝히고 벌과 나비들을 초대하고 화촉을 밝힌다. 주례는 하늘의 해님으로 모셨다. 빗속에서도 역사를 하고 있는 식물들, 언제 휩쓸려 내려갈지 모르지만 잎을 키우고 열매를 잉태하여 꽃을 피우는 식물에게서 인생을 배운다.

잿빛구름이 또다시 비를 몰고 오고 있다. 떨어져 있는 살구를 난 바구니에 주워 담는다. 그리고 우산을 쓰고 사람 구경이 하고 싶어서 골목으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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