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
다림질
  • 정규영 <청주시 수동>
  • 승인 2011.07.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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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규영 <청주시 수동>

전화벨이 울린다. 매주 화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울리는 벨소리. 나의 엄마는 그 전화통화를 마치시면 다림질을 시작하신다. 마법에 빠진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며, 아주 정성스럽게 다림질을 하신다. 분무기에 아껴두셨던 향수 한 방울도 떨어뜨리고는 다리시다 말고 그 냄새를 흐뭇하게 맡아보신다. 내가 엄마의 특별한 다림질을 곁에서 지켜본 지 벌써 10년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의 친정엄마, 손자 녀석들의 할머니로만 계셨던 의무감을 그분을 만나시면서 떨쳐버리신 듯했다. 그분 역시 사별하시고 장성한 자식은 곁에 없어 두 분이 서로의 외로움을 잘 이해하신 듯했다. 서로 고민도 털어 놓으시고 맛있는 음식도 사 드시고 종종 나들이 가시는 모습이 보기 좋아 재혼을 권해 드렸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달리 엄마의 선택은 아니셨다. 지금 이대로가 좋으시다는 거였다. 다 늘그막에 재혼은 싫으시다는 엄마를 '자유연애주의자'라며 놀려 드렸다. 나는 엄마가 아버지와의 결혼 생활이 평탄치 않으셨기에 두 번 다시 결혼이란 거에 얽매이고 싶지 않으신가 하는 어림짐작을 토대로 그럴수록 하시라고 졸랐다. 그렇게 날짜 정해 만나시느니 만날 곁에서 보면 더 좋잖냐고. 나도 홀어머니 짐 좀 벗어 보자는 둥, 이런 저런 말로 엄마의 항복을 얻어내려 했다. 딸내미의 성화에 지치셨다는 듯 하루는 조용히 부르셨다.

"난 싫다. 넌 젊어서 좋으면 같이 살고픈가 본데, 우리 늙은이는 그게 아녀. 그 양반 전화가 좀만 늦게 와도 지난밤에 뭔 일 있나? 나 맘 아퍼서 그 짓 못혀. 니 아빠랑 살면서 희희낙락은 안 했어도 맘 아팠던 거 생각하믄... 두 번 다시 꺼내지 마라. 그 양반도 이해한다. 그 양반 전화 받고 설레며 다림질하면, 꼭 너 연애하던 때 생각나서 나도 그때로 되돌아간 거 같다."

엄마의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삼십대라 살날만 생각했는데 칠십대의 엄마는 갈 날을 생각하셨던 거였다. 서로에게 몸이 안 좋아지면 미리 헤어지자고. 보내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암묵의 약속이었다.

엄마의 재혼을 핑계로 내 부담감을 벗어버리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왜 나는 엄마를 한 여자로서 보지 않고 한 남자의 아내의 자리에 복귀시키려 했을까 여자로 사랑받을 때 행복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여자이면서 말이다. 데이트를 앞둔 들뜬 여자의 마음을 누가 모르랴!

내 엄마는 칠십 노구의 할머니가 아니다. 다림질을 하시면서 자신 마음의 주름을 하나하나 펴시면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웠을 20대의 꽃다운 처녀로 변신하신다. 이제는 내가 더 설레는 맘으로 매주 화요일 마법의 다림질을 기다린다.

더워지는 여름을 대비해 흰 모시적삼에 풀을 먹여 빳빳이 다림질하는 20대의 꽃다운 처녀 '현희씨'를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다. 내 설렘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현희씨'를 오래오래 붙잡아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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