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꽃
백합꽃
  • 이진순 <수필가>
  • 승인 2011.06.30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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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진순 <수필가>

밤바람을 타고 향긋한 향기가 거실을 노크했다. 문을 열고 뜰 앞의 화단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향기에 이끌려 후각을 곤두세우고 눈이 멈춘 곳에는 다섯 송이의 백합꽃이 전등불에 반사되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주인의 보살핌을 외면당한 백합화의 축제에 초대되어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강아지풀, 돌 깨, 명아주, 접시꽃, 라일락나무 밑은 어지럽기까지 했으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피어 있는 백합화의 모습에선 마리아 상에서 느낄 수 있는 인자함이 넘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바쁘다는 핑계로 화단 손질은 안중에도 없이 보낸 나날들이었다. 마치 아비 없이 자란 순결한 딸이 드레스를 입는 날, 책임감 없이 떠돌다 돌아와 아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심중이 이러하지 않을까.

지금의 내 모습은 욕심과 아집으로 뭉쳐진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끝없이 배우고 싶은 야망과 황금에 눈이 멀어서 늘 시간에 쫓기며 빡빡한 일과를 보내고 살아야 했다. 뜰 앞을 가꾸는 일 조차 나 몰라라 팽개쳐 버린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에게서는 어떤 향내가 나고 있을까

두 손을 모으고 인자하신 마리아님을 떠올리며 묵상에 잠겼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나만을 내 가족만을 챙기며 살고 있는 내게는 저 백합 같은 향이 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참으로 미련스럽게 살았음을 성찰하고 통회하고 있다.

어머님께선 하느님의 교리를 가르치셨다. 예쁜 마음으로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만들었고 남을 배려하고 고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라 하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꽃모종을 했다. 유년의 내 뜰은 아름다웠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 쪽도리꽃, 금잔화, 과꽃 분꽃 등을 키순서 대로 심었다.

샘가에 빨갛고 파란 나팔꽃을 올려 그늘을 만들어서 빨래나 푸성귀 목욕을 할 때는 가리개로 삼았다. 담 밑에 소담하게 겹으로 핀 빨간 봉숭아꽃이 피면 손톱에 물을 들였다. 해가 지면 멍석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어른들을 졸라 조가비 같은 손톱에 봉숭아물을 드리고, 엄마 무릎에 누워 하늘에 총총히 수놓은 북두칠성과 카시오폐아 별자리를 헤던 날들은 어디로 갔을까.

물질문명은 세상 사람들을 끝없는 욕망에 눈멀게 하고 무엇이든 채우고 나면 더 채우고 싶은 욕심만을 부채질하는지 버겁고 숨이 차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그렇게는 아니 살 것이다. 고개를 넘고 한 참 쉬었다 가듯 마음에 여유를 가져 볼 것이다.

세 아이 등에 업고 걸리면서 가치네 뜰을 걸을 때였다. 앞집 아주머니가 이고 가는 고추 광주리에서 새빨간 고추 서너 개가 떨어 진 일이 있었다. 그때 고추를 주어 들고 무슨 생각을 했었나, 참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운 꿈을 가졌었다. 이런 고추 심을 땅 한 평 갖기를 소망하지 않았던가.

그 희망의 몇 배가되는 소망을 이루고도 그 땅에 곡식이나 푸성귀 심는 시간을 아까 와 하는 여인으로 변해 버렸다.

잡풀 더미 속에서도 은은한 백합 본연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 꽃을 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나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살다보면 내게서도 백합을 닮은 향기가 날지 누가 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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