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 대강, 대충 대충
적당히, 대강, 대충 대충
  • 신서옥 <시인>
  • 승인 2011.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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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신서옥 <시인>

우리가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 중에 적당히, 대강, 대충 대충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별생각 없이 쉽게 사용하다 보니 비하적인 사전적 의미로만 우리의 뇌리에 남아 사용되고 있다. 언어의 뒷면, 한 번만 뒤집으면 또 다른 의미의 말이 될 수 있다.

그동안은 근시안적이고 학습되어진 사고로 다른 해석을 잘못된 사고로 치부해 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식당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중에 음식이나 추가적인 반찬을 시킬 때 하는 말의 대부분이 이런 적당히, 대강, 대충 대충이라는 표현을 쓴다.

'고기 몇 그램'이 아니라 "적당히 주세요." 추가 음식을 더 시킬 때도 "00만큼 주세요."가 아니라 "대강 주세요."라고 한다.

계량 단위와 재료 선택을 정확하게 말하는 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우리의 언어 표현은 계량화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계량화의 틀에서 벗어난 여유롭고 인간인적 삶의 표현이 아닐까?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우리 모습들을 부정적 사고의 틀에 고정시켜 없애야 할 폐단으로 매도해 왔지만 이것은 인간적이고 남을 배려하고 여유를 가진 우리 민족 고유의 심성이다.

적당히, 대강, 대충 대충이라는 말은 '얼렁뚱당'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여유와 상대의 배려를 생각하여 하는 말의 뜻이 들어가 있다.

여기서 굳이 사전적 의미만으로 모든 언어의 뜻을 말한다면 우리는 사고의 틀에 갇혀 살아가는 단순한 인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생각의 범위를 확장하고 의미를 곱씹어 보면 더 심오한 철학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적당히, 대강, 대충은 우리가 자로 잴 수 없는 상황에서 뭉뚱그려 이야기하는데 '뭉뚱그린다'는 것이 어느 한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언어에는 이렇게 자신만을 위한 언어가 아니라 상대를 헤아리는 언어들이 의외로 많다. 그래서 적당히, 대강, 대충 대충을 다른 시선으로 풀이하면 우리의 삶에서 어렵다고 하는 중용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좀 더 깊게 생각하면 중용이라는 철학의 최고를 표현한 언어이다. 중용이라는 철학은 우리네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최고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최고의 선을 일상에서 다반사로 사용하는 우리 민족은 겉으로 보이는 배려보다는 속 깊은 마음의 배려와 여유를 함께 누리는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칼로 벤 것 같은 의사 표현이나 기계 같은 일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와 여백을 둔 우리 민족만의 아름다운 언어 표현을 가지고 있다. 시대가 언어를 만든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의 언어나 가치가 시대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우리의 언어의 깊은 속내를 간과한 근시안적이고 학습된 잣대의 틀에 맞는 언어의 뜻만 강요해 온 교육의 부정적 산물이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의 깊은 뜻을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인간의 모습 또한 언어의 단편적이고 폐쇄된 해석처럼 부정적인 한 면의 모습보다는 이면의 포괄적인 모습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도 한결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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