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 이진순 <수필가>
  • 승인 2011.06.0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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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진순 <수필가>

노란색 붓꽃이 길 가장자리에 서 있다. 그 싱싱한 자태가 군인을 닮았다. 집 안과 밖에 널려 있는 꽃들이 아름답다. "나를 잊지 말아요" 라는 꽃말을 지닌 물망초는 보랏빛 꽃에 눈물 글썽이며 바지에 보랏빛 물을 들인다. 누가 꽃말을 지었는지 관찰력이 대단하다.

노천명의 시 '목이 길어 슬픈 짐승이여'라는 시를 음미하며 사슴의 눈을 닮은 미망인을 가슴에 새긴다. 시대의 아픔을 오롯이 몸으로 겪고 인고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미망인이다. 꽃다운 나이에 지아비를 나라에 바치고 자식을 등대 삼아 살아야 했던 여인.

전쟁의 후유증인 돌림병은 희망인 자식마저 빼앗아 갔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자식의 시신을 앞에 놓고 날 밝기를 기다리던 밤은 길기만 했다던 노인.

세상에 버림받은 죄 많은 미망인은 수많은 날을 고독과 슬픔 속에 살아야 했다.

미망인은 재혼을 결심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타고난 사주팔자가 박복했던지 1950년대 유행병으로 두 번째 지아비마저 보내야 했다. 야박스러운 운명을 탓하며 스스로 전생에 지은 업이라 위로하고 희생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하여 몸을 도끼삼아 열심히 주어진 삶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살아온 삶을 뒤돌아보면 올곧게 살고자 몸부림치면서 재혼한 것을 후회도 했을 것이고 설렁거리며 가을바람이 일면 긴 겨울 동안 자식 등 따습게 재우고 먹일 걱정 때문에 마음 놓고 밤잠을 잘 수 없었다던 여인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고 한다. 훗날 미망인이 두 번 결혼을 했었다는 것을 가족이 알게 되었다. 자식이 어미의 호적이 궁금하여 살펴보았으나 어쩌면 철저하게 전쟁미망인이었다는 것은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망인은 살면서 입 밖으로 자식에게마저 일부종사 못한 것이 부끄러워 그랬던지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으셨다.

맏자식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일생을 떠올리면 측은하여 눈물이 쏟아진다고 했다. 이름도 모르고 이씨 성을 가졌다는 아버지를 현충일이면 묵념하며 기리고 어릴 적에 하늘나라로 가신 얼굴도 모르는 부친을 떠올리며 속울음을 삼킨다.

현충일이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바람 앞에 등불 같던 나라를 위하여 생을 바친 젊은이들의 넋을 기리며 뜨거운 눈물 흘리며 외롭게 살다 가신 미망인을 위하여 묵념하고 기도했다,

세상은 변하여 이혼을 밥 먹듯이 우습게 하는 시대다. 총각한테 아이를 데리고 뻔뻔스럽게 재혼하는 여인들이 늘고 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아이들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희생하는 어머니 상도 이젠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열 달 동안 품어 키워 배 아파 낳은 자식이 귀찮다고 태어난 아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매정한 어미도 있다. 호주 제도가 폐지되고 가족부가 생기며 성이 문란해지는 사회는 타락해 가고 있다. 싱글이 편하다고 혼자 사는 남·여들이 늘어가는 사회의 앞날은 어떻게 변해 갈는지 궁금할 뿐이다.

화창한 유월 현충일 날 초록빛 물감을 엎질러 놓은 것 같은 싱그러운 아침에 조기를 내걸었다. 빨갛게 담장 너머 세상이 궁금하여 월담하는 장미꽃이 국가를 위하여 떠난 젊은이들의 넋으로 보인다. 보랏빛 물망초 꽃이 불쌍하게 살다 가신 미망인의 넋이 되어 "나를 잊지 말아요" 하고 속삭인다.

낮에는 뻐꾸기가 노래를 부르고 밤이면 애절하게 소쩍새가 구슬픈 가락을 토해낸다. 논두렁의 개구리가 고향 노래를 부르는 유월의 자연은 너무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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