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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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1.05.3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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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한동안 뜸했던 아침 산행을 나섰다. 하긴 산행이라 이름붙이기도 민망한 행보다. 왕복 한 시간 거리인데다 경사도 완만하니 산책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다. 며칠 내린 비로 촉촉해진 숲길은 부드러워 걷기 좋았다. 싱그러운 초록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흰 꽃들이 청초하다. 윤기 도는 이파리마다 햇살이 눈부시다. 지난 가을과 혹독했던 겨울, 그리고 봄을 지나온 기억들을 푸르게 펼쳐 보이는 나무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하다. 내가 사는 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쯤에서 발길을 멈춘다. 나뭇가지로 어린 산초나무 곁을 조심스레 파내고 곱게 접은 조그만 한지 봉투를 묻는다. 작은 몸에 깃들어 있을 먼 열대의 기억이 흙속에 묻힌다. 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작은 물고기에겐 어떤 빛깔로 기억되었을까?

한 달쯤 되었나 보다. 지인에게서 구피라는 열대어 몇 마리를 분양받았다. 첫날엔 어항과 여과기를 사고 다음날엔 예쁜 모래를 샀다. 다음날엔 수초를 샀고 키우는 방법을 찾아 인터넷을 검색했다. 먹이를 하루 네 번 줘야 한다는 의견부터 사흘에 한 번 줘야 한다는 의견까지 분분해 어지러웠다. 하루에 세 번 주기로 결정했지만 같은 물고기인데도 사람마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처럼 다양한 것이 놀라웠다. 눈뜨면 구피부터 살피고 밥도 구피먼저 주니까 엊그제는 남편이 웃으며 한소리 했다. "나를 걔들처럼 위하고 생각해 줘 봐."

활발한 무리 가운데 꼬리가 뭉텅 잘려나간 녀석이 있었다. 늘 수초 아래 얌전하게 떠 있던 그녀석이 걱정되어 가끔 툭툭 어항을 건드려 보기도 했다. 그녀석이 떠올라야 밥을 줬고 눈에 안 보이면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그런데 그녀석이 떠났다. 수초 사이에 몸을 둥글게 구부린 채 모든 움직임이 멈춰 있었다. 어찌하나 걱정했더니 주변에서 세면대나 변기에 버리란다. 아파트에 살다 보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그렇게 정리되는 마지막이 쓸쓸했다.

한지를 예쁘게 접어 작은 주검을 담았다. 그리곤 몸이 개운치 않아 미루고 있던 아침 산행을 나섰다. 함께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니 짧았지만 날마다 눈 맞춤으로 행복했던 시간이 따스하게 풀려 나온다. 흙을 다독거리며 내게 와 줘서 고맙다고 마음으로 인사를 한다.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다. 베란다에서 바라보면 이 언덕이 보이려니 늘 기억이 나겠지. 하긴 수많은 죽음이 존재하고 수많은 죽음이 기억 속에서 잊히는 세상인데 관상어 한 마리가 뭐 대수라고 수선을 피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일본 작가 덴도 아라타는 소설 애도하는 사람>에서 주인공 시즈토를 통해 말한다. '애도란 그가 어떻게 살다 갔으며, 누구에게 사랑받고 누구를 사랑했는지, 누가 고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또 고인은 누구에게 감사했는지 가슴에 담아두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그러기에 모든 죽음은 평등하다고.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잊는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사랑과 감사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하는 시간은 짧고 떠난 이의 삶을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느라 분주하다. 그 평가에 따라 가치 있는 죽음이 되기도 하고, 소외된 죽음이 되거나. 더러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거리로 전락하는 죽음이 되기도 한다.

애도하고 기억해야 할 죽음이 유난히 많은 오월도 천천히 가고 있다.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이라던 바보 노무현과 광주의 기억으로 아직도 가슴이 아린 오월, 그리운 기억이 하나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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