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아름다워
추억은 아름다워
  • 정상옥 <수필가>
  • 승인 2011.04.0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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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상옥 <수필가>

그 옛날 고향의 봄은 참으로 아름다웠었다.

이맘때면 긴 동면에서 깨어난 생명들이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들로 어느 곳에서든 분주했다. 논두렁에서 파릇한 새싹을 틔우는 소리, 우리 집 화단에서는 깨진 기왓장 틈 사이로 상사화 촉이 연둣빛으로 돋아나면 봄 햇살 아래서 음지에 남아 있던 얼음이 녹아 담장을 끼고 작은 도랑까지 흐르던 물소리가 완연한 봄을 알리며 경쾌하게 들렸었다.

고향을 떠나온 지도 삼십 년이 가까운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봄이 되면 뜨락에서 뛰놀던 혈육들과 친구들과 얽힌 유년의 기억들이 내 고향 옥산 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한다.

추억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은 먼저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년의 기억들이 좀은 서글픈 것도 있고 모난 것이 있을지라도 어떤 기억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게 추억되는 것은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리라.

어깨에 얹힌 삶의 고단한 무게들이 버거울 때나 혹은 무한 경쟁 속에서 쉼 없는 분투로 앞만 보며 달리다 문득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가 몰려올 때면 사심 없는 꿈을 키우던 추억의 땅이 그리워진다. 오욕칠정의 미련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는 현실은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유년시절에 미래를 꿈꾸던 길에서 얼마큼 멀어지고 허욕의 때로 얼마큼 얼룩져 있을까.

어깨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여 무력해진 내가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 땅에 서서 잠시나마 상념의 일탈을 꿈꿔 보노라니 나른한 추억에 잠겼던 정신이 굳센 현실 앞에 봄기운 같은 생동으로 잠 깨우는 듯하다.

살면서 가슴에 돌쩌귀 몇 개쯤 얹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있으랴. 아픔이든 행복이든 과거라는 시간 속에 묻히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혹시나 연륜의 색깔들이 적당히 채색된 모습으로 유년시절의 또래친구 한 명쯤과 우연한 해후를 기대하며 모교로 들어가 청솔나무 아래 긴 의자에 앉았다. 지금쯤이면 인생의 참맛에 무르익은 중년의 가장으로 또는 그 가장의 아내로 분주히 살아가고 있을 누군가를 부질없이 기다리면서.

그 옛날 온종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뛰놀아도 만장 같던 광활한 면적은 어디 갔는지. 운동장이 작아진 게 아니고 몇 십 년 동안 세상의 때를 적당히 묻히고 더 크게만 살아가려던 욕심으로 얼룩진 내 눈의 척도 차이임을 알면서도 좀은 아쉬웠다. 낯선 이방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뛰놀고 있는 저 아이들도 몇 십 년의 세월을 보낸 후 오늘을 추억하며 이곳을 다시 찾을까.

지나온 몇 십 년 전을 거슬러 올라 추억 속 시간여행을 하는 지금의 내가 어느새 지천명의 고개를 넘었으니 인생이 찰라 같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이 참으로 실감난다.

여름 한낮 땡볕 더위에 스쳐가는 바람같이 지친 삶의 휴식이 되는 고향에 묻어놓은 갖가지 추억들은 무지개처럼 허공에 그려진 감촉과 향기만으로도 내 생의 값진 보물이리라.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에는 한 발자국 느리게 걸으며 마음의 휴식공간을 비워두고 순수한 마음들을 고향에 다시 풀어놓아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만들어가는 행복의 날이 내 삶에서 다시 있을까. 행복은 광활한 것이 아니고 작고 소박한 것에서 진정 행복이 온다 했는데.

향수에 흠뻑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며 멀어져가는 가로수 나무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만 보인다. 지나간 옛 추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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