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
  • 이영창 <수필가>
  • 승인 2011.03.29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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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창 <수필가>

겨울은 가는 듯 마는 듯, 가다 돌아보고 가다 또 돌아보고, 봄에게 자리를 내줄 듯 말듯, 그렇게 오래도록 겨울과 봄은 실랑이를 거듭하다가 '지금이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 슬며시 새봄은 찾아온다.

그와 같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엉망진창 조물주 맘대로 엉켜있는 것 같아도, 철따라 어김없이 꽃은 피고 지고 하는데, 어찌하여 목련은 봄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고 하는지, 이것을 자연의 원리라고만 생각하고 말기엔 무엇인가 의미가 부족하기만 한 것만 같다.

'산에서 나무들은 저절로 나서 저들대로 살아가고, 가을이 오는가 하면 은행잎은 저절로 단풍이 드는구나.' 하는 그 말도 설득력은 없다. '이것이다' 하는 답이 없는 것이 세상사인가 보다.

수많은 잡초 중에 일년초로 태어나면, 종자가 그해 봄에 싹이 터서 어느 정도 생장한 후 꽃이 피고 열매 맺어, 땅위에 말라 죽어가게 된다. 그 기간의 삶이 일 년이라 하지만 일년초의 일생이며, 백여 년 가까이 살아가는 생명 타고 난 인간의 일생과 다를 것이 무엇이랴.

몇 해 전 월동준비를 위하여 화분들을 모두 실내로 옮기며 '군자란'만 밖에다 더 두기로 했었다. 어느 정도 추위를 견디어야 꽃을 잘 피운다는 안일한 대책이었다. 우연히도 군자란은 밖에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갑자기 겨울은 닥쳐왔고, 다음날 아침 군자란은 플라스틱 제품처럼 꼿꼿이 얼어붙고 말았다. 짙은 향으로 피어오르는 꽃의 우아함이나 욕심껏 펼쳐보는 힘찬 잎의 모습을 나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바로 다시 구입된 군자란은 나의 전과를 모른 채 잘 자랐으나 잎은 무성하였으나 꽃을 피우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원인은 분분했다. 저온감응을 받지 않아 화화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위에 모험을 걸지 않은 것, 햇볕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등이었다. 남들은 쉽게도 꽃을 피우건만 유독 나만은 십여 년 군자란 가꾸기에 노력해 왔건만 그 기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금년에도 5년이나 된 군자란을 얼려서 잎이 크게 손상되었다. 언제나 나는 미숙했다. 어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아내와 나는 밤길을 걷는다. 한없이 걸어도 끝이 없는 길을 둘이서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한다. 두서없는 이야기로 시작하기에 끝이 없는 것일까,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들려준 이야기,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어머니가 또 나에게, 오늘 못다 한 이야기는 또 다음날 나누었고 그러고도 못다 한 이야기는 또 다음날 나누고는 했다.

어느 때는 거칠거칠 눈보라가 내릴 때이었었고 때로는 보드라운 함박눈이 내릴 때도 있었으며 여름이면 보슬보슬 가랑비가 나리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부을 때도 있었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검은머리 파 뿌리 되도록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는 추워도 추워하지 않았고, 더워도 더워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수많은 대화를 나누며 살아왔어도 할 이야기는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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