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아버린 기억들

生의 한가운데

2022-12-21     이창옥 수필가
이창옥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일까. 겨울 동면에 들어 찬바람에 온몸을 내어 맡긴 나목들의 성글은 가지가 쓸쓸해 보인다. 매번 계절의 경계인 11월 달력을 넘기고 12월에 발을 디디면 맞이할 새날보다 살아낸 지나간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당혹스럽다.

문득 책방이 그토록 가고 싶어진 이유는 놓아버린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을 취소하고 부랴부랴 집을 나서 동네 서점으로 향했다. 대체 얼마만일까. 족히 십여 년은 된듯하다. 그럼에도 서점의 모습이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 신기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검은머리 히끗히끗해지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난 사장님 모습뿐이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책방 특유의 향기에 빠져 책을 펼쳐보기도 하고 신간과 오래된 책 사이를 오가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불현 듯 책방이 그리워진 이유가 젊은 날 살다시피 한 옛 서점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 걸 서점에 들어서고 나서야 알았다.

동인천역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 서림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장소이기도 했고 만나서 책을 고르며 수다를 떨던 곳이었다. 한 달 월급 반 이상을 헐어 책을 사 읽고도 부족하면 서점에 들어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사람 뜸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 삼매경에 빠졌었다. 그래도 뭐라고 타박하는 이가 없었던 것이 나처럼 책 동냥을 하던 젊은 청춘들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읽고 또 읽어도 허기지기만 했던 까닭은 앎에 대한 궁핍함과 지혜의 빈곤함을 조금이라도 책에서 채우려 했던 치기였지 싶다. 그리고 배움의 부재에서 오는 오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젊은 날은 책에서 부족한 지식을 채우려 했고 지혜를 터득하려 했다.

인터넷으로 모든 물건을 구매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요즘 편리함이란 이유 하나로 거기에 편승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굳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필요한 물건을 손가락 클릭 몇 번만으로 문 앞에 까지 가져다주니 이보다 편할 수 있을까. 책마저도 서점이 아닌 문 앞에서 받아서 읽었다. 책 사이를 누비며 눈요기도 하고 읽고 싶은 책은 다음에 와서 사려고 미리 눈도장을 찍어놓기도 했던 그 행복 충만했던 시간들은 어느새 편리함에 길들여진 나의 무심함에 놓아버린 기억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일처럼 밀려온 기억 더미들 속에 서점의 추억이 나를 흔들어 깨워 다행이다. 동네 서점이 마치 인천 대한서림인양 코너마다 돌며 눈요기도 하고 다음에 읽고 싶은 책에 눈도장도 찍었다. 신간 소설 두 권을 고르고 정호승님의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를 집어 들었다. 표제가 독특해서 소리 내어 읊조려 보다가 문득 내 처지가 슬픔을 택배로 한 무더기 받은 기분이 되어 버렸다. 명색이 나도 등단한 수필가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서점에 들어와서 소설과 시집만 집어 들고 수필집 앞에서 망설이는 내 자신을 마주했다. 씁쓸하다. 이유가 뭘까. 소설과 시집과 수필집의 차이는 또 뭐란 말인가.

나는 스트레스가 높아지면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다보면 현실을 잠시라도 망각하게 되고 안식처가 되어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린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에 시어가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며 시인의 시집을 읊기도 하고 가끔은 부족하지만 시를 습작해 보기도 한다. 그런 내가 수필을 짓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필가의 수필집 한권을 사는데 이리 망설이는 이유를 한편의 수필이 어떻게 쓰여 지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해본다. 얼마남지 않는 12월 덕분에 서점에 찾아와 기억회로를 돌리며 젊은 나를 보내고 곧 예순이 될 나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순자님의 유고 산문집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를 품에 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