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甚深)한, 사흘

수요단상

2022-08-30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심심하다'는 말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대체로 `할 일이 없어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 생각이 절대 당연한 것은 아니다.

`심심한'에 `사과' 등의 수식어가 이어지는 경우 문맥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지는 것 쯤은 중학생 정도의 지식수준이면 대체로 알 수 있다. 다만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뜻의 그 `심심(甚深)'이 `진심으로'이거나 `깊이'처럼 쉬운 표현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는 아쉬움은 있다.

최근 화제가 되는 `심심한 사과'에 대한 갑론을박이 예사롭지 않다.

시비의 화두는 `할 일이 없어 지루하고 따분'하게 하는 사과가 있을 수 있느냐는 성냄에서 비롯되었고, 무지의 질책과 더불어 문해력의 허약함에 대한 탄식과 우려가 이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빌터 벤야민이 `이미지를 읽지 못하는 것이 미래의 문맹'이라고 예단했을 때 나 또한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한 이해 이전에 문자를 통한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얇아지는 지식수준에 대해서는 경계가 경각(警覺)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세상의 기술적 진화는 눈부시고, 사람들의 생각은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사용하는 단어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음이 확연하다. 나는 그날그날 몇 마디의 말을 했으며, 몇 개의 단어로 몇 개의 문장을 완성하는 글을 썼는가.

그리고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얼마나 알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상대적 무지에 대해 얼마나 경멸하면서 앎과 모름에 대해 점점 더 높고 두꺼운 벽을 쌓고 있는가.

소통을 위한 세상의 모든 언어는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 이해의 바탕에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균형 있고 보편적인 지식수준이 필요하다. 상식이 통해야 대화가 되는 것이고, 그 상식이 신뢰를 유지할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해진다.

`심심한 사과'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착각해 비난하면서 화를 내거나, 모르는 단어, 알지 못하는 문맥에 대한 무지를 비아냥하는 대립으로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의 단절은 소통의 부재로 이어지며, 그 비극은 상대방의 말을 절대 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적 신뢰의 붕괴로 확장될 수밖에 없다.

`심심(甚深)'이 끝끝내 심심해질 수 없는 이유는 `사흘'이 절대로 `4일'로 늘어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거리와 차이만큼의 진리와 같다.

그러므로 무지와 앎의 경계는 지성과 대중의 모순만큼의 양면성이 있다. 동시대의 언어와 지성이 결코 심심해질 수 없는 `심심(甚深)'과, 4일로 늘어날 수 없는 `사흘'만큼 공통 감각을 잃어버리고 있음을 걱정해야 한다.

이처럼 멀리 떨어져 버린 언어 지식의 차이와 스스로 알려고 하지 않고, 아는 체를 비난하는 성냄의 세계에서 생각의 일치를 바라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단순히 생각이 다른 것에 그치지 않고 적대적 대립의 시각으로 상대방의 언어와 문자를 대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사안에 대한 인식론적 동질성은 절대 가능할 수 없다.

무지는 변명거리가 될 수 없으며,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려는 노력 대신 더 쉬운 설명을 요구하며 성냄으로써 배려를 강요하는 일은 어리석다. 하물며 무지를 탓하는 상대방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벌어지는 세상은 비참하다.

물론 지식을 편 가르기의 수단으로 삼거나 지배의 수단으로 여겨 세상을 현혹하려고 하는 특권의식 또한 사회적 공감대의 형성을 방해하는 엘리트 독재의 대표적 폐단이 된다.

`심심(甚深)'과 `심심', `사흘'과 `4일'이 문자와 언어로 대립되는 세상은 `실체'다. 이미지로 상징되고 표현되며, 문해력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있는 디지털 세상은 `현상'이다.

우리는 이미 나만 알고 있는 억지와 비아냥거리며 내 얘기만 하는 정치적 언어에 오염되면서 사회적 공감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니 어찌 쉽게 쓰고 가볍게 말할 수 있겠는가. 독자(讀者) 제현(諸賢)에 심심(甚深)한 사과(謝過)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