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나 머리 큰 놈이 있기 마련

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2022-07-27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아무리 잘난 놈도 그보다 잘난 놈이 있는 게 이 세상이다. 잘난 놈도 그러할진대 나 같은 범부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일화1. 동네에서 싸움깨나 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옆 동네에 자기도 아는 애가 권투 오픈게임에 출전했단다. 주먹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신나게 얻어터지고 졌단다. 저러려면 뭐하러 나와 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단다. 한참 후 동네 선술집에서 그놈하고 시비가 붙었단다. 싸움도 못하는 게 까불고 있어, “나와!”하고 한판 붙었다. 한 대도 못 때리고 신나게 얻어터졌단다. 그 친구 왈, 티브이는 아무나 나오는 게 아니더라.

일화2. 우리 동네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한주먹 하던 형이 있었다. 큰 시장으로 진출해 어깨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한 번은 단골 다방에 수하들을 몰고 들어가 왁자지껄하게 놀았단다. 워낙 자기 구역(나와바리)이니까 거침없이 놀았던 모양이다. 당연히 손님들의 눈에 거슬렸던 터. 누군가가 “조용히 합시다”라고 했단다. 흘낏 보니 체구가 자그마(좀만)해서 한주먹거리도 안돼 보이더란다. 기가 막혀서“쟤는 뭐니” 하면서 “알았으니 앞으로는 함부로 끼어들지 마시오” 정도로 이야기하고 여전히 거침없이 놀았단다. 무서울 것이 없으니까.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번에는 좀 세게 “조용히 합시다”라고 이야기해 본격적으로 시비가 붙었단다. 그 사람 왈, 여기는 주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밖으로 나가자. 어, 이놈 봐라 하면서 따라 나갔다. 수하 한둘을 가볍게 때려눕히는 걸 보고 긴장하여 본격적으로 붙어봤단다. 한 대도 못 때리고 늘씬하게 얻어터지고 무릎을 꿇었단다. 그때만 해도 지면 무릎을 꿇었다. 형님 성함이라도 알려주십시오. “내가 이름을 대면 나만 쪽팔려” 하고 표표히 사라지더란다.

다방으로 돌아와 주인에게 물어보니. 아, 그 사람 박찬희예요. 박찬희는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을 지냈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권투선수였다. 플라이급이니 체구가 작을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외모상으로는 무시할 만했을 것이다. 세계 챔피언하고 붙었으니 당할 수 없는 건 당연지사. 애꿎은 다방 마담만 핀잔을 듣는다. 야, 그럼 미리 얘기하지. 그럼 이런 수모는 안 당했을 거 아냐! “안 되니까 그만 둬요”라고 얘기했는데 안 듣고 죽인다면서 끌고 나갔잖아요.

세상은 무섭다. 숨은 고수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 삼가면서 사는 게 좋다.

일화3. 오뉴월에 노스님이 젊은 스님 데리고 외출했다 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날이 너무 더워 걷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마을을 지나가면서 우물가 처녀에게 물을 한 바가지 얻어 마셨다. 다시 길을 떠나려니 너무 더워 길 떠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노스님이 처녀의 치마를 훌러덩 들쳤다. 처녀가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치니 동네 총각들이 달려왔다. 노스님과 젊은 스님이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더위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쏜살같이 달려 동네 총각들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나 산모퉁이에서 쉬게 되었다. 젊은 스님이 “아니, 스님 노망이 나셨어요? 어째 젊은 처자 치마를 들추십니까?”하자, 스님이 하는 말 “아, 이놈아 그때가 언젠데 그걸 아직도 머리 속에 넣고 있어?”

현재에 머물고자 애쓰는 나의 고수는 여기에 있다. 괴로운 일을 잊어버리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소록소록 떠오르는 게 과거 생각이다. 후회, 회한,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를 불태우고 있는 나에게 노스님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고수이다. 잡히면 곤욕을 치룰까 봐 숨 막히게 달려온 조금 전의 일을 쉽게 털고 무심하게 웃고 있는 스님에게 처녀의 치마를 들춘 일은 하나의 에피소드가 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상념에 사로잡힌 내가 했다면? 감방에 가 있거나 청년들에게 잡혀 얻어터졌을 것이다. 하수의 비애라고나 할까.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