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단상1, 첫 발자국

生의 한가운데

2022-01-03     이은일 수필가
이은일

 

# 첫 발자국

서울 사는 큰딸이 동영상 하나를 보내 왔다. 한산해진 도로 위로 큼지막한 눈송이가 쏟아지듯 내리는 영상이었다. 하도 푸지게 눈이 내려서 제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를 찍었던 모양이다. 바로 전화를 걸어 한참 수다를 떨었다. 어릴적 할머니댁에서 비료 포대에 짚을 잔뜩 넣어 눈썰매 타던 일이며, 석정이에게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 발자국을 남기게 해주던 추억도 소환했다.

외딴 주택의 2층을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었다. 밤새 눈 내린 아침 복숭아밭도 논도 구분 없이 창밖이 온통 하얀 눈 세상이던 아담한 집이었다.

눈이 오면 나는 두 딸을 털모자에 털장갑, 털목도리로 완전무장 시켜서 데리고 나갔다. 아무 흔적 없는 새하얀 눈밭에 한 명씩 들어서 발자국을 찍게 했다. 그런 다음 발자국으로 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며 놀았다.

몇 년 뒤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막내 석정이가 태어나자 두 딸은 나이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석정이를 무척 예뻐했었다. 조금 커서는 자기들이 엄마인 양 동생을 돌보곤 했다.

눈이 오면 데리고 나가 발자국을 찍게 하고, 꽃을 만들어 주고, 강아지처럼 눈밭을 뒹굴다 왔다. 빨래야 나중 일이고 그땐 삼 남매의 빨개진 볼을 보며 그저 흐뭇했었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부모는 늙은 거라는데, 큰딸이 작년에 결혼했고 작은딸도 내년에 날을 잡았다.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늘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딸들에게 해준 게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각자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텐데 춥고 고된 시간을 견뎌야 할 때가 왜 없으랴. 바라 건데 그때 깨끗한 눈밭 위에 첫 발자국 찍던 기억을 떠올려 주길, 그래서 용기 내어 다음 발자국, 그다음 발자국을 걸어가 주길 빌어 본다. 그러면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항상 응원하며 지켜봐 줄 것이다.



# 행복한 고구마

내가 좋아하는 수필 중 목성균 수필가의 `행복한 고구마'가 있다.

말단 공무원으로 신접살림했던 시절의 얘기다. 겨울이면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었는데 야근과 상사의 화투판에 잡혀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그때 늦은 밤 버스 정거장 모퉁이에서 군고구마 한 봉지를 사 품에 넣고 가서 졸며 기다리던 색시에게 안겨 주는 재미가 있었다. 좋아하는 아내도 아내지만, 추운 날 지나는 사람도 없는 늦은 시간까지 군고구마를 팔고 있는 다리가 불편한 아주머니를 돕는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한날 아주머니 대신 아들인 듯한 소년이 일찍 좀 다니시라 하며 퉁명스럽게 군고구마를 건네주었다. 일찍 다니든 늦게 다니든 네가 무슨 참견이냐고 하자 소년이 “아저씨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감기 걸렸으니까 그렇죠.” 하며 어머니가 늘 영림서 아저씨 퇴근이 늦어서 늦었다 하셨단다.

새색시를 생각하는 새신랑의 작은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아주머니는 그 늦은 시간까지 추위에 떨며 기다려 준 것이었다. 세상에는 추워지면 추워질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남편이 집에 돌아올 때 종종 붕어빵을 사 오는데 겨울이면 중학교 근처 포장마차에서 어묵과 함께 구워 파는 `황금 잉어빵'이다. 공교롭게도 그 집 아저씨도 다리가 살짝 불편하시다.

나는 붕어빵을 받아들 때면 가끔 강원도 산골의 어느 겨울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 아주머니의 고구마가 생각난다. 그리고 가끔은 붕어빵에서 군고구마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