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질 독립성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2019-05-23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세상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모든 존재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일지라도 그 존재가 오로지 물질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람은 물질이라는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사람이 몸이라는 물질적 특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을 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진 존재다. 생각이나 감정이 물질이라는 몸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물질은 아니다.

바다의 파도를 생각해 보자. 파도는 물이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다. 바다에도 파도가 있고, 호수에도 파도가 있고, 찻잔 속에도 작지만, 파도가 있다. 바다와 호수와 찻잔에 있는 물질은 액체이지만 다 같은 액체는 아니다. 하지만 그 액체가 만들어내는 출렁이는 물결은 다 같은 출렁임이다. 이 출렁임을 물리학에서는 파동 현상이라고 한다. 모든 떨림 현상은 모두 파동이다. 파동은 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체에도 있고 기체에도 있다. 물질의 진동이 파동이지만 파동은 그 물질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질은 아니다.

파도타기를 하는 서퍼가 파도의 높이와 세기에 신경을 쓰지 그 파도를 만드는 바닷물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지 신경을 쓰겠나? 파도는 물이라는 물질이 만들어내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물과는 독립된 특성이다. 이런 것을 `기질(基質) 독립적 특성'이라고 불러보자.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은 기질 독립적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정신은 몸, 더 좁게는 뇌신경망이라는 기질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기질 자체는 아니다. 그래도 정신은 기질에 따라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정신은 기질 독립적이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기질 의존적 특성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정신보다 더 기질 독립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보다. 컴퓨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을 하드웨어로 만드는 기업이라고 한다면 마이크로소프트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업이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라는 몸을 통해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 점에서는 소프트웨어와 인간의 정신은 아주 비슷하다. 그렇다고 아주 같은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을 육체에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에서 분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하드웨어에서 저 하드웨어로 마음대로 옮겨 다닐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소프트웨어는 완전히 기질 독립적이다.

인공지능은 아마도 앞으로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이 인공지능의 지능이 바로 기질 독립적인 것의 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능을 이미 넘어섰고 앞으로 인간의 지능이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인공지능의 기질 독립성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 속에서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기질 독립적인 정보, 지능, 소프트웨어 등은 그러한 제한을 받지 않는다. 시공간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확장이 가능하다.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인간의 지능은 살과 피가 필요하지만 인공지능은 살도 피도 필요 없다. 말하자면 인공지능은 냉혈동물이다. 냉혈(血)동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냉육(肉)동물이기도 하다. 아니, 무혈, 무육 동물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제 우리 인류는 어떻게 하면 이 냉혈동물에 온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없는 이 인공지능이라는 냉혈동물이 얼마나 잔인해질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보다 더 지능이 높은 인공지능이라는 이 존재가 하느님을 대신하게 될 미래에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