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의 별 떠나다

배우 신성일 타계 … 향년 81세 507편 주연 … `세기의 톱스타' 정치인 변신 영화계 발전 앞장

2018-11-04     뉴시스 기자

 

영화배우 신성일(81·사진)이 4일 오전 2시30분 폐암으로 숨을 거뒀다.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했다.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의 상징과도 같은 배우다. 영화 507편을 주연,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1960~1970년대 충무로에서 영화와 함께 청춘을 보냈고 최고의 인기를 누린 톱스타다. 상대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만 119명에 달한다. 신성일과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여배우는 윤정희(74)로 99편에 함께 출연했다.

재수를 하던 중 우연히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가고, 1957년 신상옥(1926~2006) 감독이 운영하던 `신필름' 배우 모집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됐다. 그때 신 감독으로부터 `뉴스타 넘버 원'이란 뜻의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받게 된다. 성은 신 감독의 성씨를 따랐다.

조각 같은 용모와 강렬한 눈빛으로 반항아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독보적인 스타가 됐다.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 1963년 `가정교사' `청춘교실'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4년 김기덕(1930~2017) 감독의 `맨발의 청춘'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뒤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로맨스 빠빠'에서 처음 만난 배우 엄앵란(82)과 1964년 결혼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하객과 시민 4000여명이 몰려 큰 화제를 모았다.

원래 이름은 강신영, 예명이 신성일이다.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 강신성일로 개명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 동구에서 당선돼 의정 활동을 했다. 2001년 한나라당 총재특보를 지냈다. 17대 총선에는 정당 공천을 받지 못해 불출마했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에도 영화와 관련된 일에 앞장섰다. 2002년 춘사나운규기념사업회 회장, 2003~2005년 한국영화배우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이사장, 계명대학교 특임교수도 역임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