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도원 침류정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2018-08-26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학예실장
강민식

 

옥화구곡을 따라 하류로 내려가면 청천천이다. 청천천은 화양계곡의 물을 합쳐 괴산 괴탄(槐灘)으로 흐른다. 화양동은 우암이 머물던 곳이며, 화양구곡으로 유명하다. 화양동은 60세 이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덕원, 장기, 거제 등지로 거듭 유배를 오가며 80세까지 회덕 소제(蘇堤)와 더불어 줄곧 머문 곳이다.

우암은 옥천 구룡에서 태어나 8세 때 잠시 회덕 송촌에서 배우고 25세 때까지 구룡에 머물렀다. 26세 이후 회덕 송촌과 황간 한천(寒泉), 진잠 성전(星田), 회덕 소제, 공주 원기(遠基), 여산 황산(黃山) 등지를 60세까지 옮겨다녔다.

회덕 송촌은 송준길과 함께 공부하던 곳이며, 소재에 집을 마련하여 지내기도 하였다. 월류봉 등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한천은 32~42세에 머문 곳이다. 또 우암은 한산이씨 이덕사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공주 원기(세종시 장기면 평기리)는 피접을 떠나 한동안 머물던 처가였다.

1623년 서인이 광해군을 내쫓고 반정으로 정권을 차지한 명분은 존주대의와 대명의리였다. 왕을 갈아치울 수도 있었던 명분과 의리는 반정을 이루었지만 밖으로부터의 위협에 곧 굴복하고 말았다. 두 차례의 호란, 1637년 1월 삼전도의 치욕은 오랑캐라 배척했던 여진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었고, 곧 반정의 명분을 공식적으로 폐기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대외적인 종속성에도 불구하고 내적 의리론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급증한 충신, 효자, 열녀의 `탄생'은 다분히 의도된 면도 적지 않다.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현실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예론은 강화되었다. 특히 효종 사후 벌어진 두 차례의 예송(禮訟)은 바로 정통성 시비였다. 둘째 봉림대군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을 과연 첫째 아들로 볼 것이냐, 아니면 사대부의 예법과 같이 둘째로 볼 것인가의 문제였다.

효종이 승하한 1659년, 1차 예송은 우암의 주장대로 효종을 차남으로 보아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는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가 상복을 입을 때 장남과 차남 이하를 달리했다. 자녀 균분상속과 남귀여가(男歸女家, 처가살이)가 일반적이던 조선 전기에 비해 후기에 들어서는 양자를 들여서라도 적장자를 고집했던 사대부의 풍습을 내세웠다. 하지만 단순한 종법 해석을 떠나 왕권과 신권의 갈등으로 비화한다.

1차 예송 이후 비록 서인이 권력을 차지하였으나 효종의 정통 시비는 논란을 남기게 되었다. 결국 끊임없는 시비에 지친 우암은 화양동으로 찾아드는데, 그에 앞서 머문 곳이 침류정(枕流亭)이다. <연보> 병오년(1666) 60세 4월, “선생은 고장 마을의 분잡하고 떠들썩함을 더욱 싫어하고 또 속리산과 낙양산(洛陽山)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그 속에 숨어 살며 항상 선유동(仙遊洞)과 파곡(巴谷) 사이를 왕래하려 하였는데, 이때 와서 황씨의 정자를 빌려 우거하니, 평소의 뜻에 매우 맞았다.”라고 하여 화양동 은거의 첫발을 디뎠다.

우암이 머문 침류정은 황경신(黃敬身, 1569~1651)의 정자인데, 일찍이 경향 각지를 떠돌다 귀향하여 청천 무릉도원(武陵桃源) 북쪽 벼랑 위에 세운 정자이다. 황경신의 사위는 이사익(李士益)인데, 우암이 지은 그의 아들 이후망(李後望)의 만사에 `깊은 산 늙은 나를 누가 반가이 맞아주랴[深山老我誰靑眼]' 하였고, 묘표에 화양동에 머물면서 자주 왕래하였다고 밝혔다.

지금도 괴산군 청천면 도원리 마을회관 앞에는 무릉도원 표석이 있다. 원래는 도원교 남쪽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 지금 무릉도원 북쪽 벼랑에 있었다던 침류정 자리는 알 수 없다. 옥화구곡 만경대나 처음 화양서원의 터와 함께 어딘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