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시장, 불안과 두려움

수요단상

2018-08-21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삼성전자가 만든 스마트 TV 가운데 일부 제품의 LED패널이 과열로 그을리거나 녹는 현상이 미국과 한국에서 발생했다. 공영방송 뉴스에 나온 내용이다.

문제는 LED 패널 과열로 인한 고장에 대해 서로 다른 대처방식에 있다. 미국에서는 보증기간에 상관없이 무상교체 해주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거다. 뉴스는 2015년에 만들거나 구입한 삼성전자 스마트TV 65인치와 50인치 2가지 제품의 고장과 소비자 부담 사례를 전해준다. 결정적인 것은 “삼성전자의 TV수리정책은 각 국가의 소비자보호법에 따르고 있으며 과열현상의 원인에 따라 무상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해명했습니다.”라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같은 종류의 자동차가 국내용과 해외 수출용에 따라 품질에 차이가 극명하다는 설이 기정사실로 여겨지던 개발독재의 시절을 우리는 참아왔다. 미국인의 생명과 한국인의 생명은 서로 가치가 다른 것인가에 대한 의심도 없이 오로지 수출을 통한 부국에 희생이 강요됐던 시절. 시장은 기업이 만들고 국가도 크게 책임지지 않던 체제를 벗어나기는 이토록 요원한 것인가. 삼성전자의 경우처럼 국내 소비자를 홀대하는 제도가 드러난다면 당연히 소비자보호법을 (미국과)대등하게 개정해야 한다. 규제 철폐이거나 완화가 생산적 요소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이처럼 국민생활과 밀접한 문제의 타파에 우선하는 것이 진정 `나라다운 나라'가 아닐까.

문재인 정부가 주춤하고 있다. 일자리의 수렁과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등 `경제'가 평화와 통일의 `문화'마저도 위협하면서 이탈과 믿음의 흔들림 조짐마저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재벌에만 의존하는 `시장'의 질서에 매몰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찔끔거리는 낙수효과에 목매여 살아왔다. 그렇게 각인된 경제구조를 소득주도 경제로 바꾸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세상을, 그리고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하이데거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존재와 시간>에서 `결의'와 `이익집착'의 상반된 시장논리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구별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결의'로 이어질 수 있으나, 두려움은 눈앞의 이익에 더욱 강하게 집착하는 인간을 만든다고 진단한다.

한국 경제는 그동안 재벌에게 무제한적인 자원과 권력을 몰아주면서 성장과 고용을 온통 내맡겨 왔다. 그로인해 극단적 소득불균형과 부의 편중을 심화시켰던 그동안의 한국 자본주의 작동 방식의 탈피가 소득주도성장경제의 기본 목표인데, 최저임금인상에 모든 프레임을 덮어씌우면서 종북과 빨갱이의 자리를 대신하는 비판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시장은 항상 자유증식을 꾀한다. 그러다가 확장에 한계가 있거나 자유를 상실할 위기에 몰리면 국가로 책임을 전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재벌은 끊임없는 자본에로의 탐욕과 권력을 통해 시장을 장악해왔으나, 그로인한 경제력의 남용에 대한 자제력 또한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무소불위를 그만하고 이제 나눔에 대해 성찰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점잖게 말하는 소득주도경제는 재벌들에게는 온통 두려움이 아닐 수 있겠는가.

자영업자는 자영업자대로, 저임금노동자는 또 그들대로 일자리와 실질소득의 감소, 더 많이 벌 수 있는 기회의 차단 등으로 불안하다. 어쩌면 기득권 또는 소득 상위 그룹에 속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우리 모두는 불안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지금의 불안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결의로 이어질 수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한다. 임금이 올라가고, 그동안 착취됐던 노동의 시간은 줄어들며, 분배의 개선과 저녁이 있는 삶을 통한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 구조를 통해 성장을 촉진하는 지금의 건전한 불안이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재벌과 기득권층의 몽니를 반드시 이겨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국가와 시장은 공존으로 작동해야 한다. 언론매체를 통하는 간접방식이 아닌 국민적 교육 장치를 국가가 마련해야 하는 까닭이다. 혹독했던 여름이 가는 자리에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