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깨보다 더 고소한 참깨

生의 한가운데

2018-08-20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단발머리 차랑거리던 시절, 텃밭 둑에는 긴 수염이 흩날리는 옥수수가 울타리를 대신하고, 어머니의 꽃무늬 몸뻬처럼 화사한 하얀 참깨 꽃이 살짝 고개를 숙인 체 피고지고 하면서 삭과를 촘촘히 매달아 놓았다. 해거름이면 어머닌 긴 낫자루로 웃자라지 말라고 위쪽의 꽃가지를 툭툭 잘라 옆 가지로 영양분이 골고루 나눠 실한 결실을 보게 하셨다. 그 뜸에 떨어진 꽃을 주우려 사부작사부작 따라다니다 맹충이를 보면 기겁을 하고 달아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기다란 줄기엔 강원도 깻망아지, 충북 맹충이라 불리는 누에처럼 생긴 커다란 참깨벌레가 몸 색깔을 바꾸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하고 착 붙어 있었다. 지금도 맹충이 생각만 하면 살갗에 벌레 기어가는 것처럼 온몸이 스멀스멀 솜털이 돋는다.

문인들의 모임이 있던 어느 날, 지인의 말을 듣고 모두가 배꼽을 잡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백년만의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는 요즘, 폭염이 한참이던 어느 날 볶음 참깨 통이 바닥을 드러내자 지난해 친정어머니가 보내준 참깨 생각이 떠올랐단다.

찌는 더위에 장보기에도 늦은 시간 집에서 참깨를 볶아보기로 마음을 다 잡아먹었다. 참깨를 씻을 요량으로 양푼에 참깨를 담아 물을 붓자 참깨가 허옇게 둥둥 떠다니더란다. 내심 `아니 속이 꽉 찬 참깨는 모두 아들집에 보내고, 딸내미 집에는 쭉정이만 보냈구먼.'속으로 툴툴대며 친정어머니를 원망하며 쭉정이를 걸러내느라 몇 번을 헹구고, 또 헹구고 하다 보니 이미 참깨는 눈에 보이도록 확연하게 줄어 있었다. 이미 등줄기에 물 흐르듯 흘러내리는 땀은 괴춤에 고여 축축해지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가스불보다 더 뜨거워지고, 쭉정이만 보낸 야속한 어머니가 못마땅해 그 미움이 끓어 넘쳐 냄비에 타닥타닥 튀어 오르는 참깨처럼 불꽃이 튀었단다. 괜스레 아들만 더 챙겨주는 것 같아 애매한 오빠가 더 미웠단다.

참깨를 씻을 때, 참깨를 물에 담그고 한참을 원을 그리듯 살살 돌려주면 허옇게 둥둥 떠다니던 참깨는 물기를 머금고 가라앉는다. 그때 모래는 가라앉고 티끌은 조리질로 걸러주면 되는데 성격 급한 지인은 물에 둥둥 떠다니는 참깨가 쭉정이라 생각하고 모두 버렸던 것이다. 뿐인가 요즘 가마솥더위에 가스불 앞에서 탱탱하고 반들반들하게 참깨가 타지 않도록 계속 저어주면서 볶으려니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고 어머니를 원망했을까. 그 순간은 그간 어머니가 볶아다 준 노고보다는 쭉정이를 주셨다는 원망만 가득해 속에서 불이나 울화가 치밀어 올랐단다. 쭉정이가 아니고 실한 열매임에도 보지를 못했으니 해치(해태)처럼 눈에 보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다면 웃어넘겼지만 현 젊은 시대의 세태 같아 묘한 기분이다.

중국 문헌 이물지(異物志)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 해태, 선악을 가리고자 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 청탁하지도 들어오지도 말라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고 그 정문 광화문 양 곁에 해태를 앉혔다.

그럼에도, 그곳을 드나드는 탐관오리는 늘어만 갔다. 이에 백성은 `눈 뜨고도 못 보는 해태 눈깔!'이라했다. 지금도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마음속을 꿰뚫어 들여다보는 듯 앉아있는데 비리를 해태가 못 본 것이지 보고도 못 본체 한 것인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한 번쯤은 해태를 바라보며 그 뜻을 되새겨볼 만한 세상 아닐까.

그날 저녁, 참깨보다 더 고소한 참깨, 참기름에 쓱쓱 비벼먹을 비빔밥에 절로 도리깨침이 일고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