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간 멈춰있던 기무사 시계

충청논단

2018-07-29     권혁두 국장

 

1980년 5월 17일 국방부에서 전군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이 소집했지만 국군 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전날 저녁 일방 통보됐다. 주 장관 역시 당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의 지시를 따르던 처지였으니 이날 지휘관 회의를 소집한 주체는 뻔할 뻔 자였다. 회의장 곳곳에는 당시 최고 권부로 꼽히던 보안사령부 요원들이 배치돼 삼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 자리에서 계엄 확대와 정치권 인적 청산 등이 논의됐지만 참석한 지휘관들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백지에 서명한 후 자리를 떠야 했다. 이 백지 서명은 12·12쿠데타로 시작된 신군부 세력의 정권탈취 시나리오를 사실상 마무리하는 역할을 했다.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직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등은 이 백지연명서를 들고 신현확 국무총리를 찾아가 “국무회의를 열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해 정치인들에게 족쇄를 채워달라”고 강요했다. 이어 최 대통령을 만나 같은 요구를 전달했다. 수 시간을 달달 볶인 대통령과 총리는 굴복했다. 바로 중앙청에서 야간 국무회의가 소집됐다. 무장한 군인들이 회의장을 포위하고 국무위원들을 통제했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계엄 확대는 불과 8분 만에 의결됐다. 밤 11시 40분 정부 대변인인 문공부 장관이 이를 공표했다. 그러나 군 병력은 이보다 1시간이나 먼저 김대중, 김종필 등 신군부 집권에 장애가 될 정치인 연행에 나섰다. 정부와 국회가 무력화하고 군부(계엄사)에 권력이 송두리째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사실상 출범한 날이자 `광주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5·17 정변으로 완성된 신군부의 집권 계획은 정교하게 짜여진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됐다. 그리고 그 기획과 실행의 중심에는 보안사령부가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군부 내 권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정승화 육참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한 12·12 역시 전두환의 보안사가 기획하고 추진한 반란이었다. 남은 것은 계엄 확대와 포고령 발동으로 민간권력까지 접수하는 것이었다. 계엄 확대 명분을 쌓기 위해 대학의 강경 시위를 방관했다. 대학생들이 시위를 자제하는 분위기로 돌아서자 서둘러 지휘관회의, 국무회의 계엄 의결, 포고령 발동 등 일정을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였다.

최근 추가 공개된 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관련 대비계획 세부자료'를 보면 38년 전 보안사령부의 집권 쿠데타 시나리오를 다시 만나는 느낌이 든다. 특히 계엄 유지를 위해 국회의 손발을 묶기로 한 대목이 그렇다. 이 문건은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시도할 것에 대비해 의원들을 현행범으로 몰아 체포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계엄이 선포되기도 전에 유력 정치인들을 연행해 국회를 마비시켰던 80년도 보안사의 공작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해 정부와 민간을 옥죄자는 계획도 합수본부장을 맡아 권력을 확대한 당시의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연상시킨다. `보안 유지하에 신속하게 계엄 선포', `선제적 조치 여부가 계엄 성공의 관건'등의 문구에서도 단 하루 만에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계엄령 선포까지를 밀어붙인 5·17 정변의 핵심전략을 답습한 흔적이 드러난다.

기무사는 월권과 불법, 공작으로 근대사를 곳곳에서 좌절시킨 보안사를 개혁하고 쇄신시켜 출범한 부대이다. 그러나 기무사가 국민을 폭도로 가상해 작성한 계엄 문건은 그들의 시계가 38년 전 어둠의 시대에 그대로 멈춰 있었음을 보여준다.

국방부는 지난 27일 `국방개혁 2.0'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북한 전력에 대응하기 위한 `3축 체계'전력화를 골자로 하고 있다. 그러나 군 전력 증강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군의 정치적 중립이다. 정보부대가 민간 사찰까지 하며 청와대 친위대 역할을 해온 후진적 폐습이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많은 국민은 경악하고 있다.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겠다는 특단의 조치와 의지가 없는 국방개혁은 신뢰를 얻기 어렵다. 기무사 개혁이 국방개혁의 출발점이 돼야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