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명성황후의 여운

김기원의 목요편지

2018-07-25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지난 주말 청주예술의 전당 대공연장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지방에 사는 서민이 서울에 가서 10만 원이 넘는 입장료를 내고 뮤지컬을 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또한 봐야지 하고 벼르기만 했지 결행을 못 했거든요.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100주년이 되는 1995년에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초연된 토종 창작 뮤지컬입니다.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 `여우사냥'을 극작가 김광림이 각색하고 작사가 양인자와 작곡가 김희갑이 작사 작곡한 150분짜리 대작이지요.

초연 당시 에이콤이 12억 원이란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고, 윤석화 홍경인 등 걸출한 뮤지컬 스타를 배출하며 23년 동안 장수한 명작답게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습니다. 뮤지컬은 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 발원해 세계로 퍼진 종합 무대예술입니다.

노래(음악)로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오페라와 유사하지만 연극적인 요소에 무용과 현대적인 화려한 쇼를 융복합한 속도감 있고 에너지틱해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대중예술이자 상업예술의 표상입니다.

아시다시피 명성황후는 조선 26대 왕인 고종의 정실부인인 민비의 사후 이름입니다. 고종이 대한제국 초대 황제가 된 후 추존되어 정작 작품 속에서는 한 번도 황후로 불리지 않는.

우리나라 역대 왕비 중 유명세를 가장 많이 탄 여걸이지만 자신이 거처하는 궁궐에서 타국인의 손에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입니다.

극은 1896년 히로시마 법정에서 명성황후 시해 주범 12명에게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판결을 내려지고 이를 응징하듯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불기둥이 오버랩 되면서 장엄하게 시작됩니다.

1막은 민자영이 왕비로 간택되는 1866년부터 임오군란 후 행방불명되었다가 환궁하는 1882년까지를 담았고, 2막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궁궐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하게 시해당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렸습니다.

민비와 대원군이, 수구파와 개화파들이 벌이는 암투와, 민비를 시해하려는 일본 무사들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는 홍계훈과 민비의 최후가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준 교훈은 크게 다섯 가지입니다.

첫째, 좋은 공연은 표를 강매하지 않아도, 입장료가 비싸도 관객이 찾아든다는 사실입니다. 3일에 걸쳐 4회 공연을 했는데도 표를 구하지 못해 못 보았다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입니다.

둘째, 제작비를 많이 들이면 작품의 완성도와 관객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이 끊기지 않게 돌아가는 회전무대와 배우들의 화려한 의상과 무대장치가 극의 효과를 배가시켰습니다.

셋째, 딱히 내세울 만한 대표곡이 없었다는 안타까움입니다. 김소현, 최현주, 손준호, 박완 등 기라성 같은 명배우들이 60여 곡이 넘는 노래를 불렀으나 기억에 남는 노래를 딱히 들 수 없으니 말입니다.

넷째, 지도자의 리더십과 국력의 소중함입니다. 당파싸움과 쇄국으로 나라가 망조 들고 급기야 왕비가 자국 궁궐에서 왜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부끄러운 나라였습니다.

다섯째, 지역 공연예술계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좋은 작품과 훌륭한 배우가 있어도 제작비가 없어 무대에 올리지 못하는, 어렵사리 무대에 올려도 회전무대는커녕 무대설치비와 의상비가 부족해 겨우 흉내만 내는.

투 잡을 해야 먹고살 수 있는 지역 예술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공연의 여진이 오래가네요. 아직도 가슴 한 켠이 뜨끔하고 아리니 말입니다. 명성황후가 묻네요. 지금 대한민국호는 잘 가고 있냐고.

/시인·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