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들의 여관방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2018-07-12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내가 잘 아는 한 사람은 키가 매우 작다. 어릴 때는 키 큰 아이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싸웠다고 했다. 거기다가 말까지 더듬는다. 그런 그가 자기 음반을 내고, 대학총장과 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나보다 훨씬 더 큰 아파트에 살고 있다. 키가 작다고 이 사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공간이 키가 큰 사람보다 결코 작지는 않다.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물질을 이루고 있는 분자들도 마찬가지다. 원자들이 결합하여 분자가 되고 분자들이 모인 집단이 우리가 보고 만지는 모든 만물들이다. 분자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기체이고 분자들이 서로 얽혀 있는 것이 액체이고 이 얽혀 있음이 경직되어 있는 것이 고체다. 고체를 가열하면 액체가 되고 액체를 가열하면 기체가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고 있는 물질의 세계다.

세상에 다양한 물질이 있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소, 산소, 질소, 이산화탄소 등 수많은 물질이 존재하고 각 물질은 각기 다른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분자마다 크기와 성질이 제각기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성질을 가진 물질이 존재하는 것이다.

공기는 산소, 질소, 이산화탄소 등 다양한 분자들의 집합이다. 공기 22.4리터 속에는 아보가드로수만큼의 분자가 들어 있다. 아보가드로수는 대략 6.02×10^23개다. 산소 기체 22.4리터에 이만큼의 산소 분자가 들어 있고, 이산화탄소 22.4리터에도 이만큼의 이산화탄소 분자가 들어 있다. 산소는 산소원자 2개로 이루어져 있고, 이산화탄소는 탄소원자 1개 산소원자 2개로 이루어져 있다. 당연히 이산화탄소 분자가 산소분자보다 크기도 크고 무겁기도 더 무겁다. 그런데 같은 부피에 들어갈 수 있는 산소분자나 이산화탄소분자의 수는 같다. 상자에 물건을 넣어도 작은 물건은 많이 넣고, 큰 물건은 조금만 넣는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분자도 부피가 작으면 많이 들어가고 크면 적게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크나 작으나 들어갈 수 있는 분자의 수는 같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어떤가? 방이 100개 있는 호텔을 생각하자. 이 호텔에 투숙할 수 있는 손님의 수는 100명일 것이다. 부부가 들어가는 것을 가정하면 100쌍일 것이다. 호텔에서 손님을 받을 때, 손님이 덩치가 큰지 작은지 문제가 되는가? 덩치가 크면 80쌍만 받고 작으면 120쌍을 받고 이런 호텔이 있던가? 손님의 키나 몸무게와 관계없이 한 방에는 한 쌍의 손님만 들어갈 수 있다. 분자들도 마찬가지다. 분자가 크거나 작거나 같은 부피에는 같은 수의 분자들만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보가드로의 법칙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이야 부부도 있고 남남도 있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분자들이 무슨 사람인가? 생각도 없는 물질 분자들이 무슨 여관방 들어가듯 공간을 차지한단 말인가? 그렇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래서 아보가드로가 유명한 것이다. 당연한 것을 말했으면 그렇게 유명하게 되었겠는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유명하고, `아보가드로 법칙'이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이 세상은 아날로그 세상이 아니라 디지털 세상이다. 디지털이란 불연속적인 숫자들을 의미하는데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양자가 바로 디지털이다. 디지털의 한 디지트는 모두가 동일하다. 분자들 각각은 공간에서 모두 한 디지트일 뿐이다. 그것이 크건 작건, 무겁건 가볍건 말이다. 사람도 각각은 한 디지트이다. 키가 크건 작건, 몸이 무겁건 가볍건, 돈이 많건 적건, 지위가 높건 낮건, 각 사람은 모두 이 세상에서 똑같은 한 디지트이다. 모든 사람이 한 개의 주민등록 번호를 갖고 한 장의 투표권을 갖는다.

분자들도 그렇다. 모든 분자는 동일한 공간을 차지한다. 그것이 크건 작건, 무겁건 가볍건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은 다르지만 동일한 존엄성을 갖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