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의 세계 5

낮은자의 목소리

2018-07-12     무각 괴산 청운사 주지스님
무각

 

너도 없고 나마저 없으니 아무것도 예 없네. 소리와 형상 속에 있으나 소리와 형상이 없네. 까마귀가 돼서는 까마귀 울음 울고 까치가 돼서는 까치의 울음을 우네.

반갑습니다. 무문관(無門關) 공안으로 보는 자유로운 선의 세계로 여러분과 함께 하고 있는 괴산 청천면 지경리 청운사 여여선원 무각입니다. 하안거 결재기간을 맞이하여 스님들이 목숨 걸고 화두 정진에 여념이 없으신데요.

이 시간에는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에서 무문 선사의 평창(評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문 선사의 평창이란 지난 시간에 조주 선사께 어느 때(因) 스님이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묻자 조주 선사께서는 “무(無)”라고 대답했다고 하는 구절에 대해 무문 선사께서 해석을 덧붙인 것으로 禪家에서는 사족(蛇足)이라하여 말이나 관념적인 것들을 배재하면서 직지인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무문 선사의 평창은 날카롭고 선지가 번뜩이는 예리함이 있어 그 매력이 단연 돋보이므로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무문관에서 무문스님은 이와 같이 평창을 하였습니다.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통달하는 데 뜻이 있고 오묘한 깨달음은 궁극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만 합니다.

조사관을 꿰뚫지 못하고 마음 길을 끊지 못하면 이는 모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습니다.

일러보라. 어떤 것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무(無)' 자 하나가 종문(宗門)의 한 관문(一關)인데 이를 가리켜 선종 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하지요.

터득한 이는 친히 조주 선사를 볼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와 손잡고 같이 행하고 눈썹을 맞대고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들으리니 이 어찌 경쾌하지 않으랴! 이 관문을 꿰뚫고자 하는 이 있는가? 없는가? 삼백육십 골절(骨節)과 팔만사천의 털구멍 등 전신에 의단(疑端)을 일으켜 밤낮으로 이 `무(無)' 자를 들어 참구(參究)하되 허무한 알음알이를 짓지 말 것이며 있다 없다는 알음알이도 짓지 말고 불타는 쇳덩이를 삼킨 것같이 토하고 토해도 나오지 않게 하여 종전의 모든 다른 지견이 없이 오래오래 두고 순숙(純熟)하면 자연히 안팎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처럼 혼자만 알다가 문득 깨달아 분명하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하여서 관우장군이 대도(大刀)를 빼앗아 손에 쥔 것과 같으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에 자유자재하며 육도사생(六道四生) 가운데 재미있게 노는 그대로가 삼매(三昧)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이 `무(無)' 자를 들되 만약 끊어지지 않게 됨에 이르게 되면 바로 이 시점이 한 점 법의 촛불을 밝히기에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1칙 조주구자(趙州狗子)에서 무문 선사의 게송(偈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