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의 상대성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2018-06-28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금요칼럼-시간의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암살당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도 넘는 기원전 44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 어느 별의 관찰자에게는 그 사건이 지금 막 일어나고 있거나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일 수가 있다. 우리에게 지나간 과거라고 해서 이 우주의 모든 관찰자에게도 그것이 과거의 사건일 수는 없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상대성 이론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동시(同時)적 사건이라는 것은 같은 시각에 일어난 서로 다른 사건들을 말한다. 갈릴레이가 죽던 해에 뉴턴이 태어났다고 한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고 관성의 법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과학자이다. 그리고 뉴턴은 갈릴레이의 생각을 더 확장하여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설명할 수 있는 고전역학을 완성했다. 마치 갈릴레이가 뉴턴이 돼서 계속 연구한 것과 같이 뉴턴은 갈릴레이를 아주 잘 이어받았다. 그래서 혹자는 갈릴레이가 뉴턴으로 환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갈릴레이가 뉴턴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갈릴레이가 죽고 뉴턴이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갈릴레이가 죽고 뉴턴이 태어났다는 것은 우주적으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우주의 어떤 관찰자에게는 갈릴레이가 죽기도 전에 뉴턴이 태어났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전역학에서는 어느 한 사람에게 동시적인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이다. 동시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상대론에서는 동시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한 사람에게 동시적인 사건도 다른 사람에게는 동시적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자. “서울역과 부산역에서 동시에 기차가 출발했다.”라는 문장은 고전역학적으로는 정확한 문장이다. 하지만 상대론에서는 관찰자가 누구인지 명시를 해 주어야 한다. “땅에 정지해 있는 사람이 보았을 때, 서울역과 부산역에서 동시에 출발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 두 사건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탄 사람이 보면 서울역에서는 출발했지만 부산역에서는 아직 출발도 하지 않은 사건이다. 반대로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탄 사람이 보면 부산역에서는 출발했지만 서울역에서는 출발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는 어느 기차가 먼저 출발했지?”라고 말이다. 그 대답은 “땅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시에 출발했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있는 사람에게는 서울역에서 먼저 출발했으며,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에 있는 사람에게는 부산역에서 먼저 출발했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게 말이 되느냐!”고 해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어느 별의 관찰자에게는 로마의 황제 카이사르가 아직 살아 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이다. 그렇다면 그 별에서 전령을 보내서 브루투스가 칼을 들고 카이사르를 찌르지 못하게 막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 지구의 역사가 달라질 텐데.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빠른 전령을 보내더라도 전령이 지구에 도착하려면 기원전 44년이 아니라 기원후 2100년쯤이나 더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세상이 참 이상한 세상으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누가 뭐래도 믿을 만하고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어야 한다. 이 우주의 삼라만상은 결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여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세상이어야 한다. 문학과 예술에서는 얼마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생각을 펼쳐볼 수 있지만 과학에서 하는 주장은 확고부동한 진실이어야 한다.

그런데 과학이라는 상대성 이론이 문학이나 예술보다 더 황당한 주장을 하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과학이고 그것이 이 우주의 참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