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들의 춤

금요칼럼-시간의 문앞에서

2018-06-21     권재술 전 한국교원대 총장
권재술

 

20세기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라고 일컬어지는 파인만은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이 멸망하고 과학지식에 관한 단 한 문장을 후대에 전하게 된다면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그 많은 과학적 지식 중에서 왜 하필 이것이었을까? 그것은, 만물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지식이 과학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자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정말로 원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이 지구 상에 얼마나 있을까? 일반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과학자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원자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원자가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유물론이라고 하면 마르크스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원자설을 주장한 데모크리토스가 유물론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물질은 원자라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알갱이로 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질을 무한히 나눌 수 있다면 물질의 근본은 무한히 작은 것이어야 하는데, 무한히 작은 것을 아무리 더해도 무한히 작을 수밖에 없다. 영(0)을 아무리 많이 더해도 영이듯이 말이다. 우리가 일상 보고 만지는 유한한 크기를 갖는 물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유한한 크기의 입자가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 접하는 예로는 빨래가 마르는 현상이 있다. 빨래가 마르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물의 원자들이 증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원자를 볼 수 없는 것은 원자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작기는 해도 무한히 작은 것은 아니고 유한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 멀리 있는 양 떼를 보면 한 덩어리로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수많은 양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체들도 수많은 원자로 되어 있어서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들이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데모크리토스의 이 생각은 그 자체로도 매우 대단한 생각이지만 그 생각만으로 유물론의 창시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색깔, 질감, 차갑고 따뜻함과 같은 물질의 특성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자들의 운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오직 원자만 존재하고 우주의 삼라만상은 원자들의 운동에 의해서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더 나아가 감정, 성격, 정신, 영혼과 같은 것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은 오직 원자들이 추는 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춤에는 어떤 목적도 의미도 신의 뜻도 없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이어받은 루크레티우스라는 위대한 시인은 “나는 자연이 어떤 힘으로 태양의 궤도와 달의 행로를 이끄는지를 설명하리라. 그들이 무슨 생각이 있는 것도, 신의 뜻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이라고 읊었다.

원자라는 개념은 불가피하게 텅 빈 공간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無)라는 개념은, 수학의 영(零), 과학의 진공(眞空), 그리고 인생의 죽음(死)과 함께 가장 큰 난제 중의 하나다. 그래서 고대의 철학자들은 진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에게 진공은 물체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명한 것이었다.

이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은 후대의 플라톤 학파에 의해서 철저하게 배척되었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폐기되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오랜 침묵 끝에 더 큰 울림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는 생각, 이 간단한 생각이 인류 문명의 주춧돌이 된 것이다.

비록 내가 원자의 존재를 의심할 나위 없이 믿고 있지만, 그래도 왠지 데모크리토스가 내 영혼에까지 들어오는 것이 께름칙하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즐거움이 단지 내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춤이 아니었으면 한다. 원자의 춤 이상의 고상하고 물질로는 환원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으면 한다. 내 이성은 그런 것이 없다고 속삭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