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시대의 동굴 아파트 - 청주 두루봉동굴

역사 시선-땅과 사람들

2018-06-03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
우종윤

 

구석기시대 유적은 입지조건에 따라 한데[野外]유적, 동굴유적, 바위그늘유적으로 구분된다. 한데유적은 주로 하천 주변의 낮은 언덕이나 구릉사면의 끝자락과 들판이 만나는 지점에 발달되어 있다. 동굴유적은 오랜 기간 자연의 변화에 의해 생긴 동굴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고, 바위그늘유적은 바위면의 밑부분이 움푹하게 파여 비·바람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마련된 곳에 형성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구석기유적은 동굴유적 32곳, 바위그늘유적 2곳, 한데유적 170여 곳 등 200여 곳에 이른다. 한데유적에서는 돌 재질로 만든 석기가 다량 출토되어 구석기인들의 석기제작기술의 발달과정과 활용을 이해할 수 있는 반면 동·식물화석 등 유기물질은 분해되어 먹거리나 환경 등은 확인할 수 없다. 동굴유적은 지질학상으로 석회암 지대에 놓인 곳에 입지하는 제한성이 있으나 풍부한 동·식물화석과 사람뼈, 석기 및 불땐자리 등이 확인되어 구석기시대의 생활문화상 및 환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고고학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러기에 동굴유적은 구석기문화의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필자가 대학 2학년 여름 방학 때인 8월 초이다. 대청댐 수몰지역에 있는 청주 샘골 구석기유적 발굴(1978.7.18.~7.27)이 끝나고 동굴유적 조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온종일 여름 햇볕을 받으며 조사한 샘골유적에서의 힘든 조사에 비해 동굴 속에서 시원한 발굴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였고, 또 처음 접하게 되는 동굴유적이라는데 큰 호기심도 있었다. 1978년 8월 10일 동굴유적 조사가 시작되었다. 두루봉동굴 제2굴 조사이다. 이 조사는 18일간 진행되었다. 유적 현장에 도착하니 처음 마주한 것이 폭파를 위해 구멍을 뚫는 기계소리, 돌을 깨는 묵직한 쇠망치 소리, 폭파로 원형을 잃은 구릉모습, 흩어진 무수한 돌조각 뿐이었다. 상상했던 아름다운 동굴의 모습은 없었다. 폭파로 수직 절벽에 가깝게 깎인 바위면 중턱에 작은 둥근 구멍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2굴이다. 이 굴은 1976년 처음 발견된 후 3번째 조사이며, 필자는 처음 동굴조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굴에 이르는 길은 바위절벽이고 주변에 폭파로 깨진 돌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어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혼란스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민방공 훈련을 방불케 하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대피훈련을 하여야 하였다. 석회암 채취를 위한 발파작업이다. 굉음과 함께 땅을 흔드는 발파. 수 십 미터까지 사방으로 날아가는 돌조각들. 구석기인들의 문화흔적을 찾고자 기대에 부풀었던 꿈은 공중을 떠도는 돌조각처럼 한순간에 날아간 느낌이다. 잠시 후 깨진 돌조각들 사이에 드러난 이빨, 턱뼈, 다리뼈, 팔뼈 등 동물화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발파의 위력에 구석기인들이 남긴 유물도 흩어진 모양새다.

두루봉은 산의 생김새가 두루뭉술하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 유적명도 이를 따라 두루봉 동굴유적하였다. 어원으로 보면 두루봉은 “두루”와 “봉”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두루”는 “휘감아 싸다”를 뜻함으로 “두루봉”은 “휘감아 싼 봉우리”로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여러 동굴을 한 봉우리가 감싸고 있는 모양새다. 두루봉은 해발 160m의 경사가 완만한 두루뭉술한 봉우리로서 약 120~155m 사이에 35m의 높이 차를 두고 2굴, 9굴, 15굴, 새굴, 처녀굴,흥수굴 등 여러 굴이 분포하고 있다. 마치 구석기시대의 동굴아파트를 연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