代 이은 충효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찾아서

충북 역사기행

2018-05-23     김명철 청주 현도중 교장
김명철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며,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인 책임과 희생을 거론하는 말이 프랑스어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14세기 프랑스의 칼레라는 도시가 백년전쟁 중에 영국군에게 함락되었다. 영국 왕이 칼레 성의 모든 주민을 몰살시키는 대신 6명을 상징적으로 처형하고 성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6명이 처형대 앞으로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들은 칼레시의 시장을 비롯해 법률가, 최고부자, 귀족 등 지도층 인사들이었다. 영국 왕은 이들의 책임감에 감복하여 처형을 취소하고 칼레시를 살려주었다는 일화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탄생했다.

우리 고장 청주에도 대를 이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주시 내수읍 비중리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된 목조기와집이 있다. 이 집이 바로 안정라씨(安定羅氏)의 충신문과 삼효문이다. 충신문은 나사종의 것이고, 삼효문은 그의 아들 나운걸과 손자 나빈, 나린 형제의 효성을 기리는 정려문이다.

나사종은 효성이 지극하고 학행과 무술이 뛰어났으며, 특히 활쏘기와 말 타기에 능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충청도 관찰사 성준의 천거로 발탁되어 벼슬에 진출하게 되었다. 1486(성종 17)에 경흥부사가 되었는데, 여진족 올적합이 조산보에 침입하자,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전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이에 숙종은 나사종을 병조참판에 추증하고 충정이란 시호를 내리고 당시 청주목사였던 김한에게 이곳에 충신문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들 나운걸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고 삼년상이 끝나기도 전에 허종의 여진정벌에 백의종군했다. 그러나 올적합을 죽이지 못하자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고 탈상하는 날 자결하였다. 이에 그의 아들 나빈과 나린 형제도 효성이 깊어 여진정벌에 자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역시 아버지 삼년상이 끝나는 날에 피를 토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므로 삼대가 같은 날을 기일로 갖는 기구한 사연을 갖게 되었다. 1698년(숙종 24)에 삼효문이 나라로부터 정려됐는데, 1957년에 충신문은 팔작집으로, 삼효문은 맛배집으로 다시 건축하였다. 두 정려 건물 모두 정면 1칸, 측변 1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안에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청주에서 신탄진 가는 국도변 현도중학교 앞에도 오대남 충신문이 서 있다. 오대남은 이곳 현도면 출신으로 대호군 오효원의 손자이자 오복룡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했는데,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하여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공주로 몽진하는 임금님의 어가를 호종했다. 그 공으로 돈용교위로 훈련도감에 배속되었다가 1631년 서천만호를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창의병을 이끌고 광주에서 적군과 치열한 접전 끝에 큰 공을 세워 고원군수로 제수되었으나 왕세자를 강화도로 호종하여 용감히 싸우던 중 강화도 남문에서 순절했다. 1675년(숙종 1) 정문을 세우고 호조좌랑에 추증되었으며, 이곳에 충신각을 세워 그의 나라 사랑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그 외에도 이곳 현도면에는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한 조상의 어진 삶을 기리는 유적지들이 많이 있다. 오경례 효자각, 오대익 처 안동권씨 열녀각, 오준립 효자각, 보성 오씨 삼효각, 오상진 효자각, 진주 정씨 열녀각 등. 공동체의 아름다운 미덕이 점차 사라지는 세태만을 탓하지 말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조상의 흔적을 찾아가서 그 얼을 되새기는 시간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