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가 조헌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2018-05-13     강민식 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강민식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실록은 뒤이어 간행한 수정실록이 있어 두 벌이다. 선조실록은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 때 펴냈다. 그런데 이후 서인이 집권하면서 선조실록의 문제점을 수정하여 효종 때 다시 실록을 펴내니, 두 벌이다. 비록 전대의 실록에 문제가 있으나 이를 폐기하지 않은 것은 나름 후대의 평가를 위해 남겨놓았다. 퇴임 직전 통치기록을 없앤 우리가 부끄럽다. 이 밖에도 현종개수실록과 경종개수실록이 각각 두 가지 실록으로 전하니, 다른 두 입장을 함께 이해할 수 있다.

당연히 두 실록은 차이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의 활동도 선조실록은 매우 소략한 데 비해 수정실록은 매우 자세하다. 특히 전쟁 이전 조헌의 상소문을 그대로 수록하여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당연히 이 상소문 속 조헌은 앞날을 예측한 인물로 두드러진다.

그런데 조헌의 상소문은 임진왜란뿐만 아니라, 1589년 일어난 정여립의 난을 예견하였다. 정여립(鄭汝立, 1546~1590)이 과연 난을 일으켰는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이 사건은 황해도 감사 등이 전라도 전주에 살던 정여립이 난을 일으킨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한다. 일찍부터 거짓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송강 정철이 사건을 맡아 역모 사건으로 다루며 많은 동인이 죽어나갔다. 이 사건으로 호남은 반역의 땅으로 낙인 찍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마저 이곳을 ‘반란을 일삼는[不但背逆]’땅이라 매도했다. 군사정권이 특정지역을 차별한 역사적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인들은 기축옥사라 불리는 정여립의 난을 기획한 인물로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을 지목한다. 송익필은 송사련의 아들이다. 송사련은 1521년 주인의 역모를 고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다. 송사련은 당시 동인의 실력자 안당(1461~1521)의 아버지가 노비 첩인 중금에게서 얻은 얼녀 감정(甘丁)과 평민 송린이 낳은 아들이었다. 당시 어머니 신분을 따르던 법에 따르면 감정은 안당 가문의 노비였다. 또 노비가 낳은 송사련 또한 천민을 면할 수 없었으나 그의 영특함을 눈여겨본 안당의 배려로 노비를 면하고 잡직 벼슬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송사련은 주인의 이야기를 엿듣고 역모죄로 고변하여 안당과 세 아들은 참형을 당하고 주인의 재산은 모두 그의 차지가 되었다(신사무옥).

1575년 이후 동인들이 거듭 문제 삼아 이 사건을 거짓이라 하자 송익필 형제는 숨어 살았다. 송익필은 이이, 성혼과는 친구와 다름없었고 대부분의 서인이 그의 직간접적인 제자였다. 그의 뛰어난 예학(禮學)은 김장생을 거쳐 ‘그’에게까지 이어졌다. 도피 중 송익필은 조헌의 상소를 통해 이이, 성혼 등 서인을 우대할 것과 자신을 변호하였다는 혐의도 있었다. 자연 동인들은 조헌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 송익필을 주목했다. 집권 세력을 바꾸고, 임진왜란을 예측한 조헌의 뒤에 송익필이 있었다.

스승을 구하고 왜의 사신을 목을 베자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조헌은 옥천으로 낙향한다. 고향인 김포로 가지 않고 옥천에 머물렀다. 계모를 모시기 위해 보은현감을 자원할 때부터 이곳 가까운 옥천은 그의 고향과 다름없었다. 그래서 금산 전투 순절 후에도 여기에 묻혔다. 그리고 그의 자취를 따라 그를 기억하려는 노력이 뒤따랐다. 전쟁을 치른 후 서인의 상징과도 같은 조헌의 위상은 이곳 옥천에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미 옥천은 동인계 인물들의 영향이 강한 곳이었다. 사실 옥천은 영남지역과도 가깝고, 이곳 출신들이 동쪽으로 나아가 공부하면서 자연 동인이 우세한 곳이었다.

이제 조헌을 내세운 서인과 일찍부터 자리 잡은 동인과의 싸움은 필연적이었다. 옥천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 향전(鄕戰)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