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새소리만 들렸다

강대헌의 小品文

2018-05-03     강대헌<에세이스트>

침을 맞는 날이었어요. 한의원에 가려고 아파트 근처 산책로 주변에 있던 차 문을 열다가, 그만 몸이 얼어붙고 말았어요. 맑은 새소리를 들었거든요.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가 서로 화답이라도 하듯 그들의 언어로 노래를 부른 거였죠.

새소리가 나는 쪽 나무를 올려다보았지요. 덩치가 제법 컸어요. 직박구리 같다는 짐작을 했어요. 바쁘게 먹이를 쪼아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만한 행복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장난기로 돌을 던져대는 아이들도 없었고, 공중을 빙빙 돌면서 기회를 엿보는 매도 없었으니까요.

나무를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새소리는 멈추지 않았어요.

“뒷목 부위에서 피가 많이 나온다는 건 머리로 피가 쏠리고 있다는 겁니다.” 부황을 뜨던 닥터가 걱정스럽게 말했어요. “마음이 답답하고 머릿속이 복잡한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순 없으니, 이런저런 노력을 해야죠. 양방(洋方) 진료도 병행하고 땀을 내는 운동도 해야 합니다. 마지막엔 운동으로만 다스려야 하고요.”

병원에만 가면 궁색해져 예스맨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만 하다 나오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답니다. 엄한 소리에 혼이 나간 아이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 집으로 돌아오다가, 아까 들었던 새소리를 다시 듣고 싶더군요. 그러던 중에 지난주 4.27 판문점 도보다리 담소 때 들었던 새소리가 떠올랐습니다.

30분 동안 그때 두 사람은 거기에서 무슨 얘기를 했을까, 그런 미스터리가 따로 없었죠. 물론 완벽한 수수께끼는 아니었어요. 새소리가 여러 번 들렸으니까요. 그때 그 새는 우리 민족의 오래된 정적을 깨는 소리를 냈던 겁니다. 어떤 전언(傳言)처럼 말이죠.

그때 그 새소리마저 없었다면, `이니'와 `으니'라고도 불리는 두 사람의 도보다리 대화는 무성으로만 봉인된 롱테이크(long take) 같아서 티브이를 보던 많은 사람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했을지도 몰라요.

두 사람만이 얘기를 주고받고, 다른 사람들의 귀는 들리지 않게 하고, 새소리만 청아하게 울려 퍼지던 4.27 그때의 역사적 시간은 마치 베토벤의 `전원교향곡'1악장과도 같았어요.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만으로도 지극히 상쾌했으니까요.

기독교의 천지창조 순서에 따르자면, 새는 다섯째 날에 만들어졌어요. 여섯째 날에 만들어진 사람보다도 먼저였죠. 왜 그랬을까요? 어쩌면 사람은 입방정을 떠는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에덴동산에서도 그랬잖아요. 선악과 먹은 걸 놓고는 아담은 하와를 탓했고, 하와는 뱀을 탓했으니까요. 이건 여담(餘談)으로 여겨도 괜찮아요.

그때 두 사람이 도보다리 산책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처럼 “시간만이 답일(only time will tell)”지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검위리 마방남산(鑄劍爲犁 馬放南山)”의 무드를 보여줬다는 겁니다.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고, 말을 남산에 풀어놓는” 언로(言路)만을 걸었기에, 그때 도보다리의 새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고 평화롭게 노래를 불렀던 것이 아닐까요.

독일의 최고 보수정론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이 4.27 남북정상회담의 타이틀을 `작은 평화(Ein bisschen Frieden)'라고 붙였는데, 니콜(Nicole)이 1982년 유로비전에서 불렀던 우승곡과 같은 제목이더군요. 노래의 끝 부분 가사는 이랬어요. “나와 함께 작은 노래 하나 불러 봐요./세상이 평화 속에서 살아 숨 쉬는 노래를.” 어쩌면 우리는 이미 그 작은 노래를 들었겠네요. 그때 도보다리에 있던 그 새를 통해서 말입니다.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