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선 땅과 사람들

역사시선-땅과 사람들

2018-04-22     강민식<청주백제유물전시관 학예연구사>

조선 후기 운명을 결정한 사건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 특히 오랑캐에게 항복한 병자호란은 충격 자체였다. 정유재란을 포함하여 7년 전쟁은 나름 섬나라 오랑캐를 물리쳤다는 자존감이라도 있었지만, 북쪽 오랑캐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미 9년 전 정묘호란 때 후금을 형으로 대한다는 맹약을 맺었음에도 또다시 굴욕을 당하였으니 전란의 피해보다도 정신적인 충격이 더했다. 하여 조선의 지배층은 내심 중화(中華)를 보존하고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다는 관념적인 돌파구에 몰입했다.

이처럼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해 지배층이 자구책으로 찾은 대명의리론의 뿌리는 실제 임진왜란에 있었다. 병자호란의 상처를, 앞선 임진왜란으로부터 치유하고자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왜를 물리친 것은 다름 아닌 천병(天兵), 명나라 원군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명의 참전은 전세를 뒤바꾼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지난한 전쟁 기간 중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하였다. 실제 수군의 활약과 각처의 의병, 그리고 점차 제 역할을 한 관군이 전세를 뒤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지없이 당쟁의 잔재가 적지 않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편 전쟁 전으로 되돌아가면 전쟁의 기미를 먼저 알린 것은 서인이었다. 조정의 혼란과 백성의 고충을 덜기 위한 명분으로 왜의 침입을 눈감은 동인의 오류가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 계열이 의병을 주도하였다. 대개가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왜군에 대해 공세적이었고 실제 공을 세우기도 했던 북인이 득세하고, 광해군 때는 북인이 권력을 차지했다. 반면 전쟁을 미리 예견했던 서인의 경우 막상 전쟁 당시 의병의 활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유독 조헌의 활약이 돋보인다. 조헌은 전쟁 이전 이미 조선을 겁박하던 왜의 사신을 목 베고, 명나라에 이를 알리자고 하였다. 실제 개전 초기 명은 조선이 왜의 앞잡이가 되어 명나라를 공격한다 의심하여 조선의 파병 요청을 묵살했다.

하여튼 여러 인물의 순절 사실이 알려지고, 전선이 명나라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결국 파병이 결정되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지휘권이 넘어가고, 원군의 군량미 수급, 명 지휘관의 탐학이 더해지며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가혹한 수탈을 빗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왜군이 물러가며 전쟁이 마무리되었으나 조선에 남겨진 빚은 적지 않았다. 전쟁의 참화를 복구하고 무너진 권위를 회복하는 길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명은 조선 파병이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으니 농민의 반란이 극심해지고 북쪽 후금의 압박은 더해갔다.

특히 명 조정은 후금의 공세를 견디다 못해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준 은혜를 들어 조선군 파병을 강력히 요구했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마지못해 1618년 1만3천의 군사를 보냈다. 강홍립을 원수로 한 조선군은 이듬해 3월 결국 후금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그리고 1627년 조선을 침략한 후금군을 따라 귀국하여 화의를 마무리하였다.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 자신 문과에 급제하여 영달을 누리던 문관으로 지휘를 맡은 강홍립은 이후 역사에서 역장(逆將)이란 평가를 면치 못했다. 그를 전쟁터로 보낸 광해군 또한 얼마 후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렸다는 이유에서였다.

인조반정 이후 대외정책의 변화, 친명(親明)을 내세우되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오류는 두 차례의 호란에도 사그라질 줄 몰랐다. 치욕과 수치는 대명의리론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살아있는 명나라 장수를 제사지내고, 궁궐 안에 명 황제를 모시는 제단을 두고, 화양동에 만동묘를 세워 때마다 제사 올리니 그 믿음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