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세력 간 갈등의 현장
창사 남목청을 찾아서

충북 역사기행

2018-02-21     김명철<청주 서경중 교감>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서 대륙을 가다'답사단은 대장정 3일 만에 중국의 유서 깊은 도시 창사시를 갔다. 이곳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가슴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며,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유자명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12월13일 수도인 난징이 일제에 함락당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난징을 떠나야만 했다. 11월 말 난징을 출발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은 후난성(湖南省) 성도인 창사에 도착했다. 창사는 음식값이 싸고 홍콩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가 용이하였기 때문에 일시 기착지로 선택한 것이었다.

창사시기 백범과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고, 독립운동도 중국 국민당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백범과 요인들이 활동하는데 편리했던 것은 백범과 친교가 있던 중국의 장치중 장군이 후난성 주석으로 전임해 와서 편의를 제공하고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범은 은둔 생활에서 벗어나 본명인 김구로서 활동할 수 있었다.

중일전쟁을 독립의 호기로 여긴 백범과 독립운동 세력들은 한국광복운동연합회 소속 우파 정당인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3당 통합에 나섰다. 1938년 5월6일,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楠木廳) 9호(현재는 4호)에 조선혁명당에서 이청천·유동열·현익철 등이, 한국독립당에서 조소앙·홍진·조시원 등이, 한국국민당에서 김구·이동녕·이시영 등이 참석해 통합 논의를 벌일 때였다. 갑자기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한이 회의장에 뛰어들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한인 독립운동 세력 간 갈등의 결과 이른바 `남목청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현익철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김구·유동열·이청천이 총상을 당했다. 중상을 입은 김구는 즉시 상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김구의 상태를 진찰한 중국 의사는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방치해 두었다. 김구의 장남 인과 안공근에게 사망 통지를 하였고, 그들은 백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창사로 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김구가 기적적으로 소생했고, 응급 치료가 진행되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백범이 총격을 당한 남목청은 2007년 창사시 인민정부가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구지로 지정해 건물을 복원하고 내부에 임시정부 관련 전시관을 조성하였다. 김구가 총상 후 치료를 받았던 상아의원은 현재 중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창사 시기 임시정부 청사는 서원북리(西園北里) 6호에 있었는데, 지금은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 안타깝게도 원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뿌리를 찾는 답사단 일행이 겨울비가 내리는 창사의 싸늘한 거리에서 비를 맞고, 눈보라를 헤치며 다녔다. 이들의 모습에서 창사시기 일본폭격기의 공습으로 전황이 급박해지자 7월19일 광저우로 이동하는 임정 식구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창사에서의 임시정부 7개월, 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임에도 서로 이해하기보다는 갈등하고 반목하고, 결국에는 총격까지. 김구 선생의 사망 소식으로 절망했을 임정 식구들의 마음과 아직도 분단된 조국, 그리고 남남 갈등… 어떻게 받아들이고,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