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둔군 이론

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2017-06-14     양철기<교육심리 박사·서원초 교감>

지금 삶이 너무너무 힘들 때,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 때,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히 필요할 때 독자님들은 어디로 가는지.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장소, 또는 힘들고 어려웠던 경험과 기억이 있는 장소, 둘 중 어디를 가는지.

개인마다 차이는 있을 것이지만 필자의 경우에는 뭔가를 위해 쓰라림과 고통, 힘듦과 갈등, 피 흘림의 기억이 있었던 장소를 찾아간다. 행복했던 경험들을 떠올리며 자기회복 기능을 발휘하기보다 오히려 힘들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나를 방어하려 한다.



#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빌려 이를 `주둔군이론'으로 설명한다.

군인들이 전투하면서 고지를 하나씩 점령해 나갈 때마다 그 점령고지에 얼마씩 주둔군을 배치한다. 그런데 군인들이 전투하다가 패하여 후퇴하거나 힘들어 휴식을 취해야 할 때는 가장 치열한 전투를 했던 그 고지를 찾게 된다. 가장 치열한 전투 후 점령한 고지에 주둔군을 가장 많이 남겨두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야 안전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병력을 빨리 보강하여 다시 전투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유난히 힘들었던 그 지점에는 자신의 (심리적)주둔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심리적 `주둔군 이론'이 있다.



# 모태귀소본능(母胎歸所本能) 또는 자궁회귀본능은 인간의 삶 중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했던 장소인 어머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방어기제를 말한다. 보통은 소년기 이하 미성년자들에게 잘 나타나는 것으로 과도하게 폐쇄적인 성격을 보이거나 유아기 혹은 아동기의 습관이나 퇴행적인 증상을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엄마의 자궁 속에 10개월 동안 머물렀던 경험을 자라면서 마음속에 담아두게 된다. 이때 자기만의 공간 그리고 동굴과 같은 어두운 공간이 안정감을 주게 된다. 저녁에 이불 속에 들어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아이, 빈 박스를 이용해 베란다에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들어가는 아이, 퇴근하자마자 자기 방에 콕 틀어박혀 뭔가를 혼자 하는 어른 등은 자궁회귀적 방어기제로 자신을 보호하고 치유해가는 예이다. 성인으로 자라면서 이러한 방어기제는 여자보다는 남자에게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남자들이 여자보다 자동차에 더 열광하는 것 또한 이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자동차는 자궁회귀본능을 충실히 따르는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남자가 존재하는 한 자동차 산업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부간의 금실이 좋아지려면 남편을 위해 아주 작고 아늑한 공간을 만들어 주면 된다. 남자들은 그 공간에서 유아기적 퇴행 행동을 하며 긴장을 풀게 된다.



# 가끔 자신의 심리적 주둔지가 어디인지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대학시절,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모교 고등학교를 찾아 거창까지 갔다. 어둑한 밤이 되어 도착한 교정 한구석에 앉아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 다시 용기가 생겼던 기억이 난다.

음성 땅 깊숙한 곳에 발령을 받았을 때는 모교인 청주교육대학이 심리적 주둔군이었다. 교정 한 구석에 나만이 아는 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 위에는 한 사람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거기서 한참을 보내고 나면 힘이 솟아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실로 씩씩하게 돌아가곤 했다. 마흔이 넘어 모교 고등학교와 대학은 개발과 확장으로 옛 모습이 사라졌고 필자가 앉았던 자리와 나무도 콘크리트로 덮였다.

7년 전부터 가는 주둔지는 근무했던 학교 근처 성당의 조그만 벤치이다. 교사로서 마지막 열정을 쏟고 또 새로운 길을 가고자 준비했던 그곳은 예전의 모습 그대로이어서 나만의 주둔군 또는 모태(母胎)로 참 편안하고 좋다.

지금 있는 이곳 서원초가 나의 미래 `심리적 주둔군'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