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스와 무녀

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2017-04-12     양철기 (심리학 박사·서원초 교감)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죽은 땅에서/ 라일락꽃을 피우며, 추억과/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

1922년 발표된 엘리엇(T S Eliot)의 `황무지', 433행에 이르는 어렵고 지루한 시로 평론가들의 도움을 받아 거칠게 요약한다면 `살아도 죽은 상태로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아예 죽으라. 그럼으로써 부활하라.', `죽은 자처럼 무의미한 일상에서 각성의 고통을 겪어 깨어나라.'

`황무지(The Waste Land)에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아도니스'와 영원히 죽지 않는`쿠마에 지방의 무녀(巫女)'라는 두 명의 신화 속 인물이 나온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그 무녀는 자신을 총애한 아폴로 신에게 한주먹의 모래알 수처럼 긴 수명을 달라고 해 얻었으나, 영원한 젊음을 요청하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다. 그래서 한없이 늙어가면서 죽지는 못하고 종국에는 몸이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살아있지만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었다.

항아리에 들어 있는 무녀에게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니 그녀는 `죽고 싶다.'라고 했다. 죽어야만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그녀였다.

미소년 아도니스는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연인이었다.

그런데 사냥을 좋아했던 아도니스는 사냥 중 멧돼지에게 물려 죽는다.

아도니스가 죽어 저승에 가게 되자 지하 세계의 왕비인 페르세포네가 그를 독점하게 됐다. 이에 페르세포네와 앙숙이 아프로디테가 반발하며 두 여신은 격렬하게 싸운다. 보다 못한 제우스가 두 여신을 중재해 아도니스를 6개월은 이승의 아프로디테에게, 나머지 6개월은 저승의 페르세포네에게 보내 같이 지내게 한다.

6개월은 살아있고 6개월은 죽어 있는 아도니스.

아도니스는 늦가을에는 죽었다가 봄마다 소생하는 식물과 곡물의 상징이며 신이 되었다.

아도니스는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다시 산다.

그래야 자연의 생명력은 싱싱하게 부활할 수 있다.

정신의학자 융(Jung)은 죽음은 정화(淨化)를 의미한다고 했다.

융은 그의 꿈 분석에서 죽음은 현재 자신의 모습과의 단절과 상실을 의미하며, 죽음은 상실을 통한 성장 욕구를 의미한다고 했다. 융은 상실 없는 삶은 변화할 수 없고 성장할 수 없다고 한다.

`껍데기는 가라/사월(四月)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

4·19 시인 신동엽(1930-1969)의 `껍데기 가라'는 거짓과 위선, 불의,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껍데기로, 순수한 마음과 순결한 정신의 알맹이로 4월을 노래했다.

외세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조국의 현실에 가슴 아파 하고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민초들의 부활을 노래해온 시인의 뜨거운 가슴이 전해진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革命)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김수영(1921-1968)시인은 죽음과도 같았던 1960년대의 지적 방황과 번민, 좌절 속에서 일어서고자, 부활하고자 하는 마음을 `푸른 하늘'이라는 시로 표현했다. 시인에게 있어 자유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피의 죽음이 뒤따름을 노래했다.

2000년 전 오늘,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예수는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는 고통을 안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내일 십자가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하며, 세상의 죄를 정화한 후 부활한다. 부활은 죽음이 전제 돼야 한다. 죽음은 자기 성찰이며 자기희생이다.

정신의 완전한 죽음과 부활은 결국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 성찰과 기존 패러다임의 전복을 말한다.

지금 나 개인에게와 내가 근무하는 학교, 그리고 대한민국에도 그것이 필요하다.

어정쩡하게 살아있는 쿠마에의 무녀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재생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