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오름달, 새로운 시작
生의 한가운데
해오름 달이다. 케케묵은 기억은 바람의 등에 태워 멀리멀리 날려 보내고 싶은 날이다.
현관문을 열고 발을 딛자 숲에서 굴러온 바싹 여윈 떡갈나무 잎이 밟힌다. 찬바람이 옷자락을 펼친 마당을 한 바퀴 돌고 그네에 앉아 온몸에 뿌려지는 가녀린 햇살을 받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참새 한 마리, 적막이 그물처럼 내려앉은 마당에 앉아 무엇인가를 콕콕 쪼고 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걸까. 금새 푸드득 날아 허공의 살갗을 비집고 이깔나무 숲으로 멀어진다. 철삿줄 같은 햇살을 그네에 내어주고 일어나 텅 빈 하늘을 본다.
얼마 전, 새해맞이 청소를 하기로 했다. 걸레를 빨 따듯한 물을 뜨기 위해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솥이 뻘건 쇳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녹물이다. 솥의 물을 다 비워내고 호스를 연결하여 다시 채웠다. 그리고 장작불을 지폈다. 그러나 또 녹물이 올라왔다.
앞집 영은이 할머니에게 달려가 어찌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솔가지를 잘라서 솥에 넣고 끓이면 송진이 코팅되어 녹이 안 슨다고 하셨다. 언덕에 올라가 닿지 않는 솔가지를 펄쩍 뛰어 간신히 잡아챘다. 그리고 솥에 넣고 삶기를 몇 번 반복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어쩌면 좋으냐고 묻자 영은이 할머니는 들기름을 넣어 솥을 코팅하라고 하신다. 또 물을 비워내고 들기름을 발랐다. 그리고 불을 지피고 면 보에 들기름을 묻혀 솥을 닦아냈다. 그리고 불을 지피고 또 한 번 더 발랐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송진 때문인지 들기름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솥의 물이 맑아졌다. 파지처럼 구겨졌던 내 마음도 말끔하게 펴졌다. 영은이 할머니 말씀대로 솥이 길이 든 것 같았다.
길을 들인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인내와 수고가 겹쳐져야 하는 일이었다. 가마솥을 길들이는데도 이렇듯 시간과 정성이 드는데, 하물며 삶의 길을 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살면서 녹슬지 않고 또 삐걱이지 않고, 가고 싶은 길을 가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난 겨울, 연수를 마치자마자 운전대를 잡았다. 글공부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눈발을 헤치고 빠듯하게 도착한 글방 앞, 차 안에서 정신없이 글을 썼다. 그런데 내 글을 보신 선생님께서 가차없이 버리라고 하셨다. 칼날 같은 바람이 가슴을 훅 긋고 지나갔다. 나름대로 열심히 글 밭을 일구었는데, 낙과만 잔뜩 흩어져 있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버리겠다고 했지만 시베리아 벌판에 맨발로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더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의 밭에는 어떤 씨앗이 떨어져 있는 것일까. 글이 될 씨앗이 없는데 난 그것을 키우려 애만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다시 드는 생각. 가마솥을 길들이는데도 수많은 인내의 시간이 걸리는데, 제대로 된 글을 쓰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랴. 겨우 일 년의 세월을 들이고 새 길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이리라.
산다는 것, 길을 내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을 되뇌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과녁 없는 텅 빈 하늘, 아니 어디를 쏘아도 다 맞을 것 같은 전부가 과녁인 하늘이 나를 보며 어서 조준하라 손짓한다. 인생의 과녁에 다시 한 번 시위를 당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