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으로 시작… 진심 하나로 미국 사로잡은 거인
보잘것 없던 자동차용 걸레 패션화 아이디어 전략 적중
차량용 털이개로 美시장 30년간 제패·80개 제품 수출
괴산에 공장설립 생활용 청소용품 내수시장 강자 예고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에는 ㈜샤이닝이라는 회사가 있다. 청주~충주간 국도변에 위치해 있는 작은 회사지만 미국에서 가장 잘 팔리는 자동차용 먼지털이개(더스터)를 제조하는 회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아놀드 스왈제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등 유명 영화배우가 광고모델이 된 `샤이닝 더스터'는 미국에서 30여년간 연속으로 판매 1위를 한 글로벌 제품이다. 30명의 직원이 연간 300만개를 제조하며 미국판매 1위, 전 세계 차량용 먼지털이개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샤이닝.
그러나 이 회사에는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한몸에 안고 자란 청년이 미국의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때까지 겪은 `스펙터클'한 스토리가 숨겨져 있었다.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나 세계적인 기업가로 우뚝 선 성공신화의 주인공 이필희 ㈜샤이닝 회장(65). 청명한 가을 하늘이 가득한 날, 카리스마와 열정으로 가득 찬 그를 만났다.
◇ “진심 하나로 살아왔다”
이 회장이 현재의 위치에 본사를 잡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공장은 선친이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보도연맹학살 때 희생된 자리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선친의 넋을 위로하고, 6대 독자로서 고향을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신기리에서 태어났다. 고조할아버지가 신기리라는 마을을 만들었으며, 큰아버지는 북이면장을 지낼 정도로 뼈대있는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7개월 후인 1951년 유복자로 태어난 이 회장은 급격히 기운 가세 때문에 행상을 해야 하는 어머니와 할머니 손에 자랐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할머니의 손자교육은 철저했다.
할머니의 가르침은 삶의 지표가 되었다. 이 회장은 “내가 가진 것은 몸뚱이 하나뿐인데, 무엇을 더 보여줄 것인갚라면서 “오직 나는 진심이라는 한 단어로 살아왔다. 수십 년이 흐르면서 진심은 신뢰를 불러왔고, 신뢰는 결실을 맺어주었다”고 말했다.
◇ 장사 안 되는 가게에서 일하다
그는 대길초와 주성중을 졸업한 뒤 청주상고(현 대성고)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택한 곳은 서울이었다. 큰물에서 커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상경한 이 회장은 1970년대 명동거리에서 양화점 직원이 됐다.
명동에서 양화점을 하고 있던 친구 매형을 만나러 갔다가 친구 매형이 돈통에서 많은 돈을 꺼내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그 매형을 졸라 바로 다음날부터 월급도 없는 양화점 직원으로 일했다.
그는 당시로는 생소한 `고객관리'를 했다. 손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록했다. 맞춤 구두를 찾으러 오라고 전화를 하게 될 고객이 1000여명에 이르렀다. 서비스란 용어가 낯설었던 시절, 맞춤형 고객서비스를 하니 당연히 `미스터 리'의 소문이 퍼졌다. 고객 1000명의 명단을 가진 그는 업계의 샛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스터 리'는 명동에서 점점 유명한 세일즈맨이 됐다. 여러 점포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선택은 엉뚱했다. 장사가 잘 안돼 월세도 못 내는 양화점에 스스로 찾아갔던 것이다. 다른 양화점에서 1년 급여를 선불로 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쪼그라드는 양화점을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나만의 영업스타일을 실험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남의 가게 종업원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고객들이 나를 찾아왔다. 진심이 통한 것이다. 고객과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그의 철저한 고객관리는 더욱 빛을 발했다. 월세도 못 내던 양화점은 순식간에 매출 1위 업체가 됐고, 그의 도전은 성공했다.
어느 날, 이필희 회장에게 잊을 수 없는 전화가 왔다. 당시 명동에서 부자로 소문난 사람이 양화점 사장직을 제안한 것. 명실상부한 `사장'이 된 그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닐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 초심을 잃지 말자
이필희는 또 한 번 중대한 결심을 했다. 수산업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것이라는 지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강원도 묵호로 떠난 그가 빈털터리가 되는 데는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돈 2억4000만원이라는 거금이 모두 사라지고, 버스비조차 없는 신세가 됐다.
실패의 길이었지만, 이필희는 배짱이 두둑했다. “원래부터 가진 게 없었는데, 무엇을 더 잃을 게 있나?”라면서. 그는 “좌절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수산업에 대한 투자실패는 또 다른 도전의 시작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이필희는 친지에게 급전 200만원을 빌려 재기에 나섰다. 미국에 있는 친구가 자동차 왕국 미국의 사정을 설명한데다, 보잘것없던 자동차용 `걸레'를 패션화시키면 성공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그는 1983년 경기도에 전광(全光)이라는 회사를 열었다.
친구 편에 미국에 몇 개 보낸 털이개에 미국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곧이어 바이어가 한국으로 날아왔다.
“손에 쥐기 편하고, 귀엽게 생긴 털이개가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을 본 미국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없었다. 길가에서 그냥 한번 차량을 닦으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이거 어디서 살 수 있느냐'라고 물었으니까.”
드디어 1985년 전광이 만든 차량용털이개(지금의 더스터)가 미국에 상륙했다. 이 당시 이 회장은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작은 컨테이너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털이개 7500개를 만드는데 직원들과 함께 25일을 꼬박 매달렸다. 쪽잠을 자는 것 말고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면서 만들었다. 이렇게 컨테이너 1개, 2개로 늘어난 물량은 결국 미국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 직관력, 글로벌 기업을 만들다
샤이닝이 지금처럼 미국시장에서 독보적인 기업이 되고, 전 세계 80개국에 제품을 수출할 수 있었던 데는 이 회장의 미래에 대한 고도의 직관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적재산권, 특허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던 지난 1990년 중반에 이 회장은 특허를 내기 시작했다.
“사업이 잘되는 것은 좋았는데, 중국제품이 우리 제품의 4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으로 미국시장에 쏟아지기 시작했다”면서 “샤이닝 제품의 우수성이 특허로 보장받지 못한다면 결국 짝퉁이 진품을 누르는 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이 회장은 회상했다.
현재 미국특허 25개를 비롯해 모두 80개의 특허를 확보했다. 중국 등 후발주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는 무기를 마련한 것이다.
◇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도전
세계시장을 석권하며 탄탄한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했지만, 이 회장의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 현재 내수 본사와 중국에 공장을 두고 있으며, 미국에 판매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장은 앞으로 괴산에 4만㎡의 공장을 추가로 설립해 생활용 청소용품 등을 생산할 계획이다.
이 회장은 젊은이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역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역경을 이기려는 노력과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정으로 인생의 가치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안태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