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통치자

마음가는대로 붓가는대로

2016-02-14     이수안 <수필가>

복숭아밭마다 농부의 손길이 분주하다. 한해 농사의 출발, 전지 작업이 한창이다. 포도나무 전지를 마친 우리도 이제부터는 복숭아나무 전지를 해야 한다.

가위를 들고 복숭아나무 앞에 섰는데 막막하다.

어떤 가지를 버리고 어떤 가지를 택할 것인가. 작목반회의에서 강의도 여러 번 들었고, 밭 이웃들이 오가며 한마디씩 조언도 해 주었다. 접때는 이장님이 일부러 와서 전지시범을 두 나무 보여주고 가셨다. 그때는 머릿속에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는데, 막상 버리고 취할 가지를 스스로 선택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전지를 배워야 한다며 야심 찬 각오로 따라나선 딸이 가위 든 손을 들어 보이며 단순한 것부터 시키라고 한다. 해 줄 말이 없다. 내 잘못된 판단이 엉뚱한 가지를 살리거나 죽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나는 신임 통치자의 심정이 된다.

한 국가를 잘 이끌려면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잘 들어줘야 한다. 어떻게 해야 다양한 계층의 국민이 골고루 행복할 수 있는지 꿰뚫어보는 통찰력도 있어야 한다. 국민과의 소통이 안 되면 엉뚱한 통치를 하게 되고, 그것은 부와 권력의 쏠림현상으로 이어지며, 결국 국가적 불행을 낳을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우리 과수원도 작은 국가를 보는 듯하다.

복숭아나무는 순한 성격이면서도 품종마다 개성이 다르다. 밭도 점질 황토지만 위치에 따라 토양의 성격이 조금씩 다르다. 따라서 전지를 비롯한 모든 작업이 그 다름에 따라 적절히 이루어져야 나무들이 제 특성을 잘 살려가며 성장할 수 있고, 평화로운 과수원이 될 터이다.

신임 통치자가 난감한 일을 만났으면 타인의 지혜를 빌리는 것은 흉이 아니라 칭찬받을 일이다. 주위에는 온통 복숭아 과수원이고, 기술을 전수해 줄 선생님이 과수원마다 있지 않던가. 우리는 가위를 놓고 길을 나선다.

먼저 이장님 과수원으로 간다. 이장님은 판단도 빠르고, 말도 빠르고, 손길도 빠르다. 이쪽 가지를 자른다 싶으면 어느새 다음 가지를 자르고 있다. 이러니 그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시간적 여유를 누리나 보다. 전지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며 바로 위 당신 아우님 밭에까지 가서 다른 점을 설명해 주신다. 늘 느끼지만 참 고마운 분이다.

다음은 조금 더 위쪽 미리네 과수원이다.

미리 아빠는 이름난 고수 농사꾼이다. 그 비법을 나는 안다.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건강한 것, 게다가 부부의 뜻이 딱딱 맞으니 뭐 어긋날 일이 없을 터이다. 이런 이웃이 있다는 건 재산이다.

바로 위 과수원의 아름이 아빠는 복숭아 농사 경력이 나보다 삼사 년 선배다.

작목반 교육도 부지런히 받고 배운 바를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젊은 선배, 그래서 이제 막 복숭아 농사 걸음마를 떼는 내 심정을 잘 헤아려준다. 역시 고맙다.

다시 우리 복숭아밭이다.

도열한 나무들의 조용한 모습이 통치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순한 모습이다.

우리는 더듬더듬 조심스럽게 가지를 자른다. 하지만 필시 딸과 나는 자르지 말아야 할 것을 자르거나, 잘라내야 할 것을 남기는 실수도 하고 있을 터이다.

그럼에도 일을 진행한다. 혹시 올해는 과오를 범하더라도 내년부터는 제대로 할 수 있으리라 마음 다져 먹으면서.

아무래도 내 복숭아나무들은 어설픈 통치자를 만난 것은 확실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