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生의 한가운데

2016-02-02     박명애<수필가>

날이 흐렸다. 공항은 한적하고 쓸쓸했다.

비수기라 관광객이 적은 탓도 있지만, 무채색 건물이 주는 차분함과 입국 심사 직원들의 무표정이 분위기를 낮게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십 년 지기들이 벼르고 별러 떠나온 곳이 중국 장가계다. 일정에 맞추다 보니 겨울 여행이 되어 버렸다.

이번에도 역시 여행사 가이드는 길림성 연변에서 온 조선족 남성이다. 말끝이 둥글게 말려들어 어눌하지만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버스 안에서 그는 여행일정을 설명하고 행선지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사이사이 조선족들의 삶을 풀어놓곤 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굶주림을 피해 혹은 일제 강점기 일제의 폭압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과 일제의 강제이주정책으로 정착하게 된 사람들의 후손으로 소수민족 중 유일하게 대학교를 갖고 있음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아간다 했다. 문득 작년 여름 계림에서 만났던 가이드가 궁금했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 얇은 눈꺼풀 아래 살짝 치켜 올라간 눈초리가 날렵하던 그. 부드럽게 웃음을 머금고 있으나 일행을 둘러보는 예리한 눈빛과 등산복 바지 속에 감춰진 팽팽하고 단단한 종아리. 적당한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유창한 우리말은 노련한 가이드임을 느끼게 했다.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계림에 아파트를 장만했다고 했던가. 그 역시 연변에 아내와 딸을 두고 온 기러기 아빠였는데 그렇게 헤어져 살게 된 사연이 인상 깊어 가슴에 묵직하게 남아있다. 아내는 관광상품매장에서 근무했는데 아이 교육이 고민이었다.

계림에는 조선어를 가르치는 유치원도 학교도 없다 보니 한족 유치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할아버지가 전화해도 손녀와 조선어로 대화가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조선어를 잃어버리면 희망이 없다고 했다. 결국 아버지 성화에 못 이겨 아내와 딸을 연변으로 보내 아이가 우리말을 완전히 익힐 때까지 그곳 조선어 학교에 보내고 있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 아이 얼굴을 볼까 말까 한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면서도 우리말을 지키려 애쓰는 그들의 노력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혹은 관광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연로한 노인들과 어린 손주들만 남아 있는 연변의 현실을 걱정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나 부모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의 바르지 못한 인성이 점점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한족 언어교육을 강화하는 중국의 정책 때문에 십 년 후면 과연 조선어를 할 줄 아는 교포들이 얼마나 될까 결국 중국화 될 거라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환경은 다르지만 편법을 써서라도 외국인학교에 보내려 애쓰고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일찍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 어른이 되어서도 한국어를 제대로 못 하는 자녀를 둔 사회지도층과 비교가 되었다.

조선족 가이드들이 공통으로 쓰는 말이 있다. ‘우리 민족’이다.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한국은 우리였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 사는 우리는 그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우리말은 점점 순수함을 잃어간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둘러보는 내내 그들의 고민이 내 안으로 스며들어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내는 것만이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일이리라.

설날 멀고도 먼 여정 길림성 연변 고향으로 떠날 그들에게 꿈꾸는 대로 이루는 새해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